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7

clara jeon 2018. 6. 21. 19:27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歐碑가 모두 일곱인데 이것이 그중 하나이며 원석은 이미 분실되었다. 이 본은 담계노인이 宋拓 제본들을 合校하여 濟寧學院에 摹刻한 것이다. 일찍이 成親王이 임모한 것을 보았는데 이본과 殘字의 수가 같지 않았다. 성친왕이 임모한 것은 바로 南海吳氏本이었으니 이 본을 합교할 때 미처 수합하지 못한 것 같다. 歐法은 각지고 강하기가 쉬운데 이 본은 원만의 정신을 얻었으니 구법에 조예가 깊은 노사가 아니면 이를 이룩해낼 수 없었을 것이니 더욱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구법을 가장 소중히 여겨 신라 때부터 고려중엽까지 모두 발해의 遺法을 정성껏 따랐는데 고려 말부터 본국 초에 와서는 오직 宋雪, 趙孟頫만을 익혀 점차 서가의 고법을 잃어서 歐書가 어떤 것인지조차 몰랐다.
그 뒤에 또다시 스스로 기치를 높이 내세워 저마다 晉體니 鍾. 王이니 하며 어릴 때부터 익히는 것이 모두 <樂毅論>. <黃庭經>. <遺敎經>뿐이고 그 밖에 것은 바로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지금 익히고 있는 <악의론> <황정경> <유교경>이 어떤 본인지도 몰랐다. <악의본> 진본은 당나라 때 보기 어려웠고 <황정경>은 왕우군의 글씨가 아니며 <유교경>의 경우는 당나라 때 사경생의 글씨이다. 그래서 趙子固가 이르기를 “해서에서 법을 취하려면 <化度寺>, <九成宮>, <顔家廟堂> 세 비석이다”라고 했다. 조자고가 살았던 때는 지금부터 600-700년 전이 되는데 600-700년 전에 이 세 비석으로 해서의 정법을 삼았다면 조자고가 어찌 <악의론>, <황정경>에 대해 이와 같이 정의해야 할 줄을 몰랐겠는가. <악의론> 등은 와전과 유실로 근거삼기 어렵지만 이 세비는 아직도 원석이 남아 있어서 晉代의 서법을 소급해갈 수 있다. 이것은 당을 통해 진으로 들어가는 정로이며 이를 놔두고선 달리 갈 곳이 없다.
근자에 우리나라 한 서가가 ‘萬毫齊力’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데 懸腕도 강구하지 않고 擫. 壓. 鉤. 揭의 七子法도 강구하지 않고 九宮間架도 강구하지 않은 채 ‘만호제력’만으로 서법을 완료하고자 하니 본질에 대한 접근이 안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만호제력’을 거론했다면 ‘漿深色濃 ’을 더 거론하지 않는 것인가. 나도 모르게 붓을 놓고 한바탕 웃을 뿐이다.
禮堂學人이 燈影庵에서 써보다.(후지츠카, p159)

추사는 이 글에서 연경 방문 후, 조선의 낙후되고 편협한 서예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조선의 서가의 경향이 遺法, 古法의 길을 잃고 歐書가 어떤 것인지 모른 체, 오직 조맹부의 송설체만을 진적 없이 변형된 서체를 모방하는 서법을 考證으로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서의 석묵서루의 소장품, 진적들과 배관, 청의 학예들과 한묵들과의 교류로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조선판의 학문 탐구에서 벗어나, 唐을 통해 晉으로 들어가는 法古的인 正路, 그러나 진흥왕 순수비 등 옛 古碑들의 금석문을 고증하는 등의 토착적인 創新的인 학예인으로 탈바꿈 되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실제로 그의 글씨는 옹방강의 글씨체로 변화하였지만, 담계의 글씨를 모방하는 것만이 絶頂이 아님을 체험한 독자적인 금석학의 연구로 추사는 이 모방의 한 매듭을 통과하며 유사 이래, 그 누구도 닮지도 않는 그 누구도 닮기 난해한 국제적이면서도 극히 조선적인 法古創新의 개성적인 추사체를 창조하게 된다.
    귀국 후에도 담계를 흠모의 정으로 섬기는 추사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의 서재를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寶覃齋’라 이름 지어 담계와의 私淑의 의미를 늘 눈에 보이게 마음에 담고 있었다. 더욱이 연경으로 가는 사절단 등의 인편에는 자신의 견해를 논술한 서찰, 일본에서 수입된 작품, 학예자료 등 감사의 선물을 보냈다. 담계 역시 수십 통의 서간문을 통하여 지극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여 漢宋不分論에 입각한 法古創新의 학술을, 추사의 질문에 세밀하게 논증하며 사제 간의 돈독한 정으로 지도한다. 이러한 담계와의 한묵의 인연은 추사를 書道에 극한 된 변모만이 아닌 그의 학예관, 더 나아가 ‘平心精氣 博學篤行’의 평생의 배움, 즉 正道, 靜道의 학예의 삶으로 이끌어 가는 디딤돌로 추사의 삶에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