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3

clara jeon 2018. 6. 21. 19:14


    첫 번째 서찰은 <추사 인형과 헤어진 지 8년(秋史仁兄別來八年)>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경 21년(1816)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을 간추려 보면 “6년 전에 귀양가는 몸이 되어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가 금년에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막 수도로 돌아왔기에 아직 관직을 얻지 못해 궁핍하게 지내고 있다. 지난 해 인편으로 보낸 전탁석의 그림은 임모가 다 끝났다면 다시 돌려받고 싶다.” 이를 보면 추사는 귀국 후에도 청나라 화가들의 그림을 직접 받아 임모하며 공부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서찰은 도광 원년(1821) 정월 28일자 글로 주길인, 이심암, 진탁석 등 연행에서 사귄 청의 학자들의 안부와 조선의 청심환과 먹을 보내달라는 요청과 옥도장 5개를 예물로 보낸다는 내용이다. 이를 보아 이들이 주고 받은 물품 내역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서찰은 도광 원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보낸 것으로 “조강의 시와 탁석의 그림과 서신을 써서 사신 임군을 통해 보냈으며, 옹방강 선생의 오언절구 대련 한 쌍을 주길인이 써서 보낸다.”의 내용으로 추사가 청의 학자들의 글씨를 받아 이를 모본으로 임서하였을 가능성이 보여 진다.
    네 번째는 도광 3년 봄에 보낸 서찰로 완당의 부친 酉堂 金魯敬이 동지겸 사은정사로 추사의 동생 山泉 金命喜와 함께 연경에 왔던 때로, 옥수는 유당과 14년 만에 재회로 두 부자를 초대해 환대한 내용이다. 整齊된 美辭麗句로 재회의 情況이 절제되어 그려진 편지글,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름이 흩어지고 달을 대하자 홀연히 귀하의 편지가 와서 세 번 반복하여 기풍에 임하니 마치 직접 대화하는 듯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 궁중에 일직을 하면서 당연히 조선 사람이 이르러 올 이가 있을 것이라고 한창 생각하였는데 뜻밖에 또 이러한 현명한 이를 모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21일 저녁에 하직을 당해서 수레 소리를 22일 새벽에 임하여 바라보고 아침에 대담하고 낮에 전별주를 마시고 흩어졌는데 오후에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공들이 오면 반드시 한 달을 머물 것이니 바로 회포를 풀기에 좋을 것입니다. 귀하께서 주신 것은 가상함에 감사하며 혹 보답하기를 생각하고 官紙로 답을 드립니다. 대강 이만 줄입니다. 안부를 여쭙니다.”
17일 2경에 玉水 아우 江이 披雲仙腋에서 쓰다.(후지츠카, p502)

그리고 이어 유당 편에 전해진 편지는 “헤어진 후 벌써 14번 해가 바뀌었으며 유당과 산천을 만났는데 마치 족하를 보는 듯했고, 새로 制誥中書라는 벼슬을 제수 받았으며, 서첩, 차, 향초를 보내며, 白蔘을 보내 주기 바란다. 진석사, 주길인, 이심암은 아직 산속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옥수가 유당과 헤어질 때 석별의 정을 담은 예물은 唐碑 1, 船山詩 1, 手制筆 2, 書箋百番으로 이들의 학문적 성향이 금석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강은 추사의 부친 유당과 동생인 산촌과도 학구적인 교류는 물론 필요한 물품을 주고 받은 지인 사이였으며,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당연히 추사는 조강에게 요청한 물품과 답장을 보내 귀국 뒤에도 끊이지 않은 학문적인 교류가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