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2

clara jeon 2018. 6. 21. 19:12

    김정희가 연경에서 만난 이들은 曹江, 徐松, 翁方綱과 그의 아들 樹培, 樹崐, 阮元, 朱鶴年, 李林松, 洪占銓 , 李鼎元, 金宜園, 金近園으로 당대의 名賢들이었다. 옹방강과 완원을 중심으로 연계된 추사와 청의 학자들과의 私淑과 墨緣은 귀국 후 서간문에 사제 간, 朋友 간의 학문적, 정신적 교류가 돈독히 침윤되어 있다. 이들의 지리적인 여건을 초월한 서간문으로 소통한 학문 지도, 연구를 위한 문방 지원, 특히 탁본 지원은 물리적인 거리가 원활한 교통 편의로, 인터넷 보급으로 시공간을 넘어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작금의 학인들에게 학문탐구 心志에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 장에서는 추사가 연경에서 청의 문인들과 만나게 되는 정황을 서술하고, 이들에게서 받은 학예적 영향은 다음 장에서 세밀하게 논술한다.

(1)曹江
조강은 자는 玉水, 호는 石谿로 김정희의 연경에서의 송별시에 “명문가의 자제 조옥수는 가을 물을 정신으로 옥을 골수로 삼고 있다. 名家子弟曹玉水 秋水爲神玉爲隨” 표현되었듯이 명문가의 자손으로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웠으며, 그의 부친 錫寶의 명성은 조선에 까지 알려진 건륭시대의 명사로 조옥수 가문은 명문가였다. 大理評事의 관직을 지낸 조강은 이미 가경 6년(1801)년에 초정 박제가와 혜풍 유득공을 만났고, 혜풍에게는 시 한수를 쓴 부채를 선물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이 고아, 다정하다.

만 리 밖의 기묘한 인연 맺어
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누었다.
고아한 명망은 중국과 조선에도 드날려,
새로운 시가 옛 역에 전해진다.
[호저집縞紵集] 밖에 정을 두고,
바다 구름 멀리 돌아간다.
다시 사절 따라온다 해도,
한 해나 더 기다려야 한다.(후지츠카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p142)

    이어 가경 10년, 초정에게 간찰을 보내 자기 모친의 부음을 전했을 정도로 옥수는 김정희를 만나기 전에 초정과도 깊은 학연을 맺어진 것으로 보여 지는데, 아래 조강의 글에서 “慨然起別想 四海結知己 如得契心人 可以爲一死 日下多名士 艶羨不自已”는 추사의 시로 조강이 인용한 것으로 보아, 초정이 1801년 연행 시, 자신이 이런 웅지의 꿈을 안은 패기 찬 청년 추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賞揚하며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동쪽 나라에 金正喜 선생은 자가 秋史로 올해 나이가 24세이다. 넓은 세상을 보려는 뜻을 가졌는데 일찍이 지은 시에서 “개연히 특별한 생각이 일어, 세상 밖의 지기를 사귀고 싶다. 만일 마음 알아주는 이를 만난다면, 목숨을 내줄 수도 있다. 연경에는 명사들이 많아, 부럽기 그지없다”라 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세상과 뜻이 잘 맞지 않고 과거시험을 위한 글은 짓지 않았으며 세상 밖에 널리 관심을 갖고 시도 잘하고 술도 능하며 중국을 매우 좋아해서, 스스로 동국에는 사귈 만한 인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지금 조공 사신을 따라 연경에 들어왔는데 천하 명사들을 두루 사귀어 옛 사람이 우정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를 본받으려 한다.(후지츠카, p144)


위의 글을 읽어 보면 옥수는 초정에게서 들은 추사의 대한 내력을 흠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상과 뜻이 잘 맞지 않고 과거시험을 위한 글은 짓지 않았으며 세상 밖에 널리 관심을 갖고”에서 조강과도 義氣相通한 이 표현은 내포된 眞意를 읽을 수 있듯이 추사는 생원 급제시험 준비 과정에서 과거의 폐단을 체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론 논의 부분에서 당대와 현재의 교육 상황을 비교, 비판하면서 상세하게 논술하기로 한다.) 당대의 청과 조선의 석학으로 당시 추사의 나이는 24세, 옥수는 29세의 청년인 혈기왕성한 이 두 학자들은 날카로운 예지력과 비판력으로 오류거 책방이나, 법원사에서 학문과 문학을 토론하며, 학연으로서의 지기의 발판을 다졌을 것이다. 그러한 정황으로는 귀국 후에도 이들이 우정을 깊이 나눈 서찰에서도 볼 수 있다. 완당은 자주 조강에게 서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그 글들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도광 6년(1826) 10월 申翠微가 동지부사로 연행했을 때 완당이 지은 送別詩 가운데 다음과 같은 편린만 남아 있다.

술 마시는 동방삭(東方朔, 왕록우 王록友)이 맑은 해학 더하고,
웅대한 가슴 펼치자(조옥수) 사방에서 놀란다.(후지즈카, p500)

조옥수가 보내온 소식은 몇 통 전해지고 있는 데, 마지막 네 번째 서찰은 도광 3년 봄에 보낸 것으로 이는 완당의 부친 유당에게 보낸 서찰이다. 이 서찰들에 열거된 학자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이들의 학연은 단지 개인 간의 우정이 아니라 당대의 청의 학자들과 조선 학자들 간의 학문 교류가 왕성하였다는 엿 볼 수 있다. 이 서간문을 소장한 후지츠카 치카시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네 통의 서찰을 일목요언 정리하였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더 간결하게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