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出生과 成長過程(5)

clara jeon 2018. 6. 15. 18:44

   추사가 월성위궁에서 종손으로서 받은 교육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민규호의 『阮堂全集, 第一卷, 阮堂金公小傳』에서

博極羣書『阮堂全集, 第一卷, 阮堂金公小傳』
많은 책을 널리 읽고

甫弱冠 貫徹百家之書 宏深弘博 淵乎若河海之不可量野 專心用工 在十三經 尤邃於易 金石圖書詩文篆隷之學 無有窮基源 尤以書法 聞天下
공은 약관의 나이에 百家의 서적을 관철하여 학식이 대단히 깊고 그것이 마치 헤아릴 수 없는 河海와 같았다. 특히 전심하여 공부한 것인 十三經이었고, 그 중에서도 周易에 더욱 조예가 깊었으며, 金石. 圖書. 詩文. 篆隷 등의 학문에 대해서도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더욱이 書法으로 천하에 명성을 드날렸다.(『阮堂全集, 第一卷, 阮堂金公小傳』)

 기록으로 보아 ‘河海’와 같은 학문의 도량은 생부와 생모의 교육과 고향을 떠나 한양 장동 월성위궁에서의 종손의 역할에 필요한 경학 연구와 서예 연마로, 師友敎育이 그 근거지라고 볼 수 있다([추사 김정희 연구],137p). 추사는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경주 김씨의 종손으로서 조숙한 진중함으로 집안의 길흉사에 대들보 역할을 하면서 학예를 切磋琢磨하며 선비로서의 도량을 연마하는 소년기를 보냈을 것이라 推定된다. 이러한 추사가 열다섯 살 되는 해, 집안이 氣勢가 안정되었는지 婚姻을 한다. 부인은 李羲民의 딸인 韓山李氏로 장인은 비록 벼슬은 없지만 명문 가문으로 한산이씨는 淸白吏 李台重의 증손녀이다. 또한 이 무렵 추사는 조선후기의 정치, 문화, 경제는 물론 일상의 소소한 삶까지도 開化하려는 北學派 석학 楚亭 朴齊家를 스승으로 모셨다. 박제가는 민규호가 말한 ‘일찍 부터 가정(家庭)과 사우(師友)들로부터 전해 받은’ 추사의 학예 기본 뿌리 깊은 家學에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북학의 新傾向的인, 先進的인 文物을 성심으로 가르쳤을 것이다. 그 시기에 박제가는 이미 연경을 네 차례나 見聞하고 [北學議]를 탈고했던 시절이므로, 이 석학에게 [북학의]에도 소개된 선진적인 문물의 신경향 가르침을 받았을 호기심 많은 천재성을 지닌 추사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의 배움에 대한 동경의 웅지를 표출하였다.

慨然起別想 개연히 한 생각이 일어서니
四海結知己 사해처럼 넓은 지기를 맺고 싶다네.
如得契心人 만일에 마음 깊은 사람과 인연을 얻는다면
可以爲一死 가이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日下多名士 태양 아래에 명사가 많다는데
艶羨不自已 부럽지 않을 수 없구나.

이 시는 후에 연경의 젊은 학자인 曺江에게도 전해졌는데, 이는 박제가가 연경에 갔을 때 자신의 영민한 제자 추사가 북학에 뜻을 세운 의지를 가상히 여겨 조강에게 추사를 자랑삼아 소개하였기 때문이고, 스승의 예지였는지 훗날 1810년, 청년인 추사가 자제군관 자격으로 부친 김노경과 연경을 갔을 때에 첫 인연을 맺은 청나라 학자가 조강이다. 당대 초정은 청나라 석학 100여명과 교류하고 선진적인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심지어는 [북학의] 저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상적인 의식주에서의 장단점 등을 두루 섭렵하고 그 장점을 실질적으로 조선 땅에 移植시키려했던 당대에는 보기 드문 개화된 글로벌한 인재였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고 있을 북학의 꿈을 성심으로 가르치어, 추사에게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과 학예에 대한 동경심으로 개화적인 안목 갖추게 한 박제가는, 辛酉迫害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801년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고 1805년 유배에서 풀려나나 이내 타계하고 만다. 박제가는 추사의 스승이기는 하였으나, 서얼로 당대에는 賤民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스승 박제가를 존경하며 追從한 것으로 보여 지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은거한 스승을 찾아가고자 하는 제자 추사에게 보낸 박제가의 답장으로 사제간의 온정이 행간에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