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出生과 成長過程(6)

clara jeon 2018. 6. 15. 18:45

薄曛奉書 如自帷中望見 甚可異也 在楊偶取遯之大象 足下何以徑聞此號耶 乃知韓康賣藥忽作
霸陵山中想耳 客驢無控 如得小溪 未必導前 宜今隨後 但春朝寒 有威矣 不利于水石之行 可悵

어스름이 지고 있는 무렵에 편지를 받아보니 마치 휘장 속에서 보는 듯 심히 기이합니다. 양구에 은거하고 있음을 그대는 어찌 이리 소식을 접하셨습니까. 한강은 약초를 팔다가 홀연히 패릉산으로 숨을 결심함을 이해할만 합니다(후한시대한강이란 이가 약초를 팔다가 어느 여인이 알아보자). 당나귀를 몰 때는 잡아끌지 말아야하고, 작은 시내를 만나면 앞에서 당기지 말고 당연히 뒤에서 따라가야 합니다. 다만 봄날의 아침 추위가 위세를 떨치고 있으니 물 따라 돌 따라 가는 행장이 순조롭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정유각전집],[완당평전 1]재인용)


   이처럼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추사에게 실학의 싹을 심어 논 스승 박제가가 유배를 가던 1801년, 추사가 16세 되었던 해에 친어머니 기계유씨가 불과 34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추사의 상심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閔奎鎬가 <완당김공소전>에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性孝友愛”기록으로 보건데, 추사는 명문 가문 출신의 어머니로 부터 삶의 예법을 배웠을 것이다. 기계 유씨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기록물로는 남편인 김노경이 아직 微官末職 시절, 지방관으로 전전할 때 남편에게 보낸 書簡文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전형적인 명문가의 조선 여인으로 남편과 자식에 정성과 애정을 다하는 정성을 엿 볼 수 있다. 한글 궁체의 흘림체로 단정하게 쓴 이 편지는 기계 유씨의 단아한 기품과 그녀의 필력있는 기계 유씨가의 연원을 감지할 수 있다. 여인으로서 보기 드물게 붓 길의 강약 리듬이 자연스러우며, 강한 필력이 있어 추사의 글씨가 어머니로 부터의 始點임을 알 수 있다.
    母親喪과 스승의 유배로 상심이 컸을 집안에 1805년, 추사 나이 20세 때에 생부 김노경이 과거에 급제하는 慶事가 일어난다. 純祖는 영조대왕의 사위, 월성위의 손자 급제를 월성위 묘에 致祭하여 줄 정도로 축하하였다. 이어 이무렵 추사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관례를 올리게 되는데, 이 관례식에서 子를 伯養으로 받으나 후에 元春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바로 이 경사가 있던 해에 추사의 부인인 한산 이씨가 나이 스물에 갑자기 타계하여 추사의 이십대 초반은 친족이라고는 친아버지 김노경과 동생 명희. 상희밖에는 없는 허망하고 불우한 시절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우환 속에서 추사는 둘째부인 禮安 이씨와 화촉을 밝힌다. 장인 李秉鉉은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人物性同論을 주장한 巍巖 李柬이 예안 이씨의 고조부로 온양의 명문 집안이다. 추사에 생애와 학예에 該博한 一家見이 있는 최완수는 이 재혼을 “은반지를 잃고 금반지를 얻은” 행운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실제로 이 혼사 이후 어지러운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안 이씨는 훗날 추사의 제주 유배로 집안의 장손인 남편이 부재 중임에도 불구하고 賢母良妻로서 집안의 길흉사를 추사 대신으로 至誠으로  率先垂範, 추사의 집안은 안정되었다.(이상 유홍준[완당평전], 20160125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