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의 형성과정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1

clara jeon 2018. 6. 21. 19:09



2. 추사의 평생배움의 형성과정 2) 연경방문.hwp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


   1809년 11월, 24세에 추사는 生員이 되는 司馬試에 합격되어 사회적으로 出世할 기틀을 세운다. 생원이라는 벼슬이 주어진다는 것은 청년기의 理想的인 思惟를 현실의사회로 立志하는 기반으로, 한 인간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추사가 出世의 입문인 생원이 된 그 해에 호조참판으로 재직하고 있던 생부 김노경이 冬至副詞로 선임되어, 추사는 子弟軍官의 자격으로 楚亭으로 부터 動機誘發되어 벼르던 대망의 청의 연경 길을 부친과 동행한다. 자제군관이란 정사나 부사 외교관들이 개인적으로 아들이나 동생 등을 동행, 외국 문물을 공부하여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제도로 공식수행원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로운 動線 移動으로 그곳의 풍물을 규제 없이 견문할 수 있었다.

    조선사절들이 연경을 방문하여 활동한 사례에 대한 세밀한 기록은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로 국내외 학자들에게 인정되어온 후지츠카 치카시의 박사학위논문인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청나라를 연행한 조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이 유리창 서점가를 중심으로 연경에서 청나라 학자들과의 學緣을 맺는 과정과 평생 학문지기로서의 교류를 이 책의 총설에서 지나치도록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 이유를, 후지츠카 치카시는 역대 사절단들의 이러한 노고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실사구시 학문은 마침내 근역 경학의 대종사라고 해야 할 완당 김정희 이르러 구름을 뚫고 치솟는 늠름한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라 일단 매듭지으며 “나는 그와 같은 완당을 그려내고자 서막으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긴 글을 써온 것이다”라고, 추사를 “청조문화의 핵심을 포착한 經學을 구축한 석학으로 조선 500년을 통틀어 완당을 그 제일인자”로, 확고한 자리매김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였다.

    김정희의 학문 깊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후지츠카 치카시의 이 논증처럼, 24세 청년 김정희의 1810년 연경 방문은 김정희 개인으로서의 웅지의 꿈 “慨然起別想 四海結知己 如得契心人 可以爲一死 日下多名士 艶羨不自已”를 이루는, 청나라 명사들과의 學緣으로 그의 이십 대 청년기의 품성과 학예관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 더 나아가 조선의 학문과 예술 문화계에 미친 영향력, 즉 조선후기 賤流 학예 문화의 거듭나기의 巨頭, 巨木 ‘완당 바람’으로의 자리매김을 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작금의 추사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은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연구 논문을 참고하지 않으면 추사 학예의 역량을 가늠할 수 없다.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는 후지츠카 치카시가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 중국철학교수로 발령받았을 때, 조선 학계를 “宋明學 末流 이외에는 무엇이 남아 있겠냐?”는 논자들의 비하 평가에 대한 반박이자 도전이기도 한 10년간 故心慘憺, 최선을 다해 서적 1000여 권, 서간, 탁본 류 1000여점을 수집, 섭렵하여서, 이를 밑거름으로 조선의 청학 東傳을 파헤친, 도쿄대학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한 석학으로서, 20여 년 치밀한 고증으로 연구해온 10여 편의 논문을 재정리한 박사학위논문이다. [논어총설]의 저자이기도 한 후지즈카는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의 연구를 정통한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의 석학으로 그의 博學함이, 일본인으로서, 일제 강점기 하에서, 추사를 이처럼 인정하다면 추사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 군더더기일 것이다. 이렇듯, 개인과 조선의 학예문화에 한 획을 그은, 더 나아가 우리나라 知省史에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世人과 학자들에게 膾炙, 연구되는 추사 학예의 山嵩海深은, 드물거나 없을 것이라 보아진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이 논문에서, 淸朝文化 東傳의 추사 역할에 대한 논지는, 그가 淸과 朝鮮에서 축적한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추사의 시대로 부터 逆追跡하여 북학파의 중심인물인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청나라 학자들과의 인간적인, 더 나아가 학문적인 행로를, 이를 기반으로 추사와 연경학자들과 학연으로의 귀착을, 극히 심도있으며 정밀하게 천착 탐구로 펼쳐진다. 일본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사를 비롯한 조선인 북학파 학예인에 대한 존경과 열정은 현대의 한국인의 학자들에게 겸허한 학자상, “平心精氣 博學篤行”를 거듭 다지게 한다. 따라서 다음의 기술은 이러한 연유도 있지만 추사의 연경에서의 행적은 선행연구도 참고하나, 주로 후지츠카 치카시의 [淸朝文化 東傳의 硏究]에 기반을 둔다.

    김정희는 순조 9년, 1809년 10월, 冬至兼謝恩使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부친인 이조판서 金魯敬과 兼掌令, 李永純을 부사로 정사인 朴宗來를 수행하여 1810년 3월 초 까지, 연행의 왕복한 날 수를 제외하면 대략 60일 정도 연경에 체류 하였다. 당시 24세인 김정희는 연경 방문에서의 일정을 매우 주도면밀하게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보여 진다. 60일에 불과한 연경에서의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추사가 公. 私적으로 이룩한 학예적인 성과는 그가 귀국 후에 청나라 학자와의 私淑과 墨緣, 그리고 훗날 ‘완당 바람’이라고 일컬어 질 만큼의 조선 학계에서의 파장에서 엿볼 수 있다. 김정희는 대개 사신들이 명소, 생소한 이국 풍물 등의 호기심을 구경으로 만족하는 즐거움으로 연행을 소일한 모습과는 판이한 학구적인 일정을 보냈다. 그가 지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학수고대하던 청의 명현, 석학, 巨匠鴻儒들과의 學緣에 동분서주한 행적이, 특히 翁方綱과의 만남을 주선한 徐松과의 서간문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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