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出生과 成長過程(3)

clara jeon 2018. 6. 15. 18:34

    추사의 外家 杞溪 兪氏 역시 명문으로 시조 兪三宰는 신라 阿飡을 역임하였다. 兪三宰의 후손 兪義臣이 신라 멸망 후 忠臣不事二君의 의지로 고려 왕조에 불복하자, 고려 태조 왕건이 그를 杞溪縣 戶長의 벼슬을 주어 이로 인하여 기계를 본관으로 稱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서 兪得瑄, 兪僐, 兪承桂 3대가 좌복야 봉익대부판도판서, 봉익대부판도판서 등의 요직으로 크게 현달, 기계 유씨는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선 초에 들어와서는 兪孝通이 세종시대 집현전의 제학이 되었으며 노중례와 함께 『향약채집월령』등을 약술했다. 또한 기계 유씨가에 名賢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忠穆公 兪應孚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 평안도 절제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는데, 세조에 의해 억울하게 쫓겨난 단종을 복위 하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처참한 죽임을 당한, 우리 역사상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어 추사의 외조부 雅齋 兪漢蕭(1718~1769)는 문과에 급제, 함경도 관찰사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문장과 隸書로 유명한 兪漢雋과 兪漢芝는 4촌과 6촌 형제간이다. 기계 유씨 가문을 크게 증흥시킨 조선 영조때 영의정에 올랐던 知守齋 兪拓基는 기계 유씨의 대표적 인물로 당대의 명상으로 정언, 사간, 이조참의, 대사간, 경상도관찰사, 호조판서, 우의정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인품이 중후하여 대신의 기풍을 지녀 시류에 야합하지 않는 기상으로 영조의 신임을 얻어 고관대작의 요직을 두루 역임할 수 있었다. 또한 고금의 역사에 該博한 학예로 품성이 古雅하였다. 당대의 명필가로 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한 그는 글씨로는 경주의 <新羅始祖王碑>, 청주의 <萬東廟碑>, 저술로는 [知守齋集] 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이러한 기계 유씨들의 才氣의 흐름을 보아 추사의 淸高古雅한 인품과 詩書畵文史哲뿐만 아니라 금석학에 대한 조예 등, 해박한 학예와 추사체로서의 명필의 근원이 親家뿐만이 아닌 半弄으로 외탁한 천재성으로 보아진다.이상 유홍준[완당평전], 20160125 위키백과, 姜朱鎭 <僻派家門 出身의 秋史 金正喜>참고.
    추사의 성장과정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양가의 명문 기운을 받은 神童다운 모습이 보여 진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학예에 천재성이 보여 영민함으로 일찍이 글을 깨우쳐서 이미 여섯 살 때에 ‘立春大吉’이라는 글씨를 써서 월성위궁 대문에 붙였는데, 이 <입춘첩> 글씨에 이미 書道에 대가가 雄志가 보였던 듯, 北學派 巨頭인 楚亭 朴齊家의 눈에 들어 추사의 부친에게 ‘앞날에 학문과 예술로 명성을 높일 것이니 자신이 가르치겠다’고 청하였고, 훗날 추사가 15세 되는 무렵에 스승이 되었다. 또한 이 <입춘첩>에 언급한 이는 대대로 노론계파인 김노경의 노론 집안과는 世嫌인 남인의 영수이며,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인 樊巖 蔡濟恭으로, 이 두 가문은 相從하지 않았다. 그러나 채제공은 대문에 붙인 <입춘첩> 글씨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고 추사의 아버지에게 ‘이 글씨를 쓴 아이는 명필로서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나, 그리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하여 지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말고 문장으로서만 뜻을 이루게 하라’는, 추사의 운명을 예언한 신기로운 이야기를 하였다 한다.
    이렇듯 이미 어린 나이에 주변의 명현들로부터 주시와 찬사를 받은 추사는 여덟 살 무렵 백부인 김노영의 양자로 출계하여 월성위궁 경주 김씨가의 종손이 된다. 큰집에 후손이 없자 막내 아들 김노경의 장자인 추사를 입양하여 집안의 대를 잇게 한 것이나, 어린 추사로서는 큰아버지를 아버지로 아버지를 작은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 등의 환경 변화, 경주 김씨의 종손으로서의 엄한 예법과 교육은 심리적으로 혼란스런 충격과 중압감을 주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렇듯 명문가의 종손으로 학예가 이미 천재성을 보여 촉망을 받으며 성장하는 추사가 열두 살이 되던 1797년, 양아버지 김노영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 김이주도 타계하고 만다. 그리고 연이어 할머니와 사촌형의 타계로, 초상을 치르기에 정신이 없었던 추사의 소년기는 친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한 우울한 압박감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 갓 열 살을 넘기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특히 집안의 양 기둥이었던 조부와 양부의 서거는 추사로 하여금 월성위궁 집안 웃어른이 됨은 물론 경주 김씨 가문의 대들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으니, 추사는 어려서부터 조숙한 진중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추사의 소년기의 의젓하고 기품이 엿보이는 편지 한 통이 전하여지고 있는데, 월성위궁 백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간 여덟 살 어린 추사가 예산에 계시는 생부 김노경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접어두며, 인편이 있어 급히 써 보낸 종손의 예의바른 안부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