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의 源泉 : 法古創新 (5)

clara jeon 2020. 4. 13. 17:46

    요즘의 세태, 청소년들은 마음을 모우고 정신을 집중한 독서 글들의 문자향과 서권기가 오롯이 스며들어 인간의 도리와 예로 삶을 다듬기에는, 눈요기감으로 ‘아는 척’하기에도 바쁜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간다. 전인적인, 인간다운 삶의 길을 현란한 죽음을 일삼는, 현실과 게임을 구분 못하는 인간성의 퇴화로 자신의 능력을 허황하게 오버하게하는 게임으로 죽이고, 아이들은 구차한 거렁뱅이로 가벼운 핸드 폰만 파고 있다. 그냥 음란도 하고 천박도 하고 삶은 그냥저냥에 저당잡힌 음지의 기생충이어도 삶이라 숨쉬기는 한다. 그래서 교실은 하품을 길게 하며 엎드려 잠자는 곳, 집도 잠자는 곳, 學生은 없고 야동이나 눈빠지게 보는 너절하게 굴러다니는, 표피적인 겉치레로 ‘척’이라도 해야 얻어먹기는 하는 쓰레기 소굴화되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봉감독이 예리하게 파헤친, 그 예리함의 함의, 한국사회의 치부의 민낯이다. 신나게 놀았는데 뒷맛이 찝집한, 상류, 하류를 싸잡아 시궁창에 쳐넣어 개망신 통쾌하긴 한데, 그것들의 모두가 슬프고 비참하고 허망의 빈 손, 미국에서 상을 휩쓸고 타와도 왠지 슬쩍 망신을 당한 듯한 씁쓰레한. 문제는 이 기생충들이 음지에서 대중문화의 탁류로 뻔뻔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요즘 뉴스를 장악하다시피한 “N번방 조주빈”의 사건은 이 사회의 기생충들의 Maginot線, 이들의 悖惡스러움은 봉준호 감독이 차마 다루진 못한 [기생충]들의 필연적의 變態慾求의 浮上이다. 그러나, “악인은 하는 일이 벌이가 되지 않고 작업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다(지혜서)” 약삭 빠르게 이리저리 빠른 길만 찾아다녀서는 아무 성취가 없는, 낫은 잡초 벨 때나 유용하지 아름드리 거목을 벨 때는 아무 쓸모가 없다(정민, [오직 독서뿐]). 이제 우리의 사회는 인간성을 상실한 아람드리 잡초들의 무리들에 의한 해악질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 인간의 도리와 예를 저버린 무례한 기생충들을 선도, 혹은 제거할 만큼의 역량을 갖춘, 구한말의 추사의 제자들이 천류문화의 흐름을 “완당바람”의 법고의 진득함으로 淸流의 개화를 파장하였듯이, 지식인들의 혜안, 明澄함의 實事求是 행동력이 急求하다.
    추사의 장서 목록을 보면 청소년시절에는 조선선비로서의 전인적인 인생관의 지존, 시서화의 안목을 확산을 위한 고전을 섭렵하였음이 드러난다. 고전에서의 옛 성현들의 마음 흐름의 올곧은 혼의 역사의 서술 읽기, 즉 법고의 숙독은 추사 학예의 기초 디딤돌이 되어 장년과 노년기의 신학문을 받아들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여 전무후무한 “추사체”를 창출하게 하였다. 추사체에는 옛 학예인들의 心靈과 추사의 골수가 한 맥으로 흐르는 골기가 올곧게 수류화개한다. 그래 추사의 글씨체는 종이에 내려 근 筆壓이 마치 바위를 뚫는 듯한 직도이행이 행해예전서를 망라, 일맥으로 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 흐트러짐없는 일맥상통의 혼의 내재가 현대인에게도 어떠한 자유분방한 붓질에도 눈길을, 마음 길을 공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추사의 서체에서만의 美感이 아니다. 추사의 글을 읽어보면 그것이 비록 사사로운 서간문임에도 그곳에는 무시할 수 없는 추사 예술인 삶의 실사구시적인 실존이 녹녹하게 습윤되어 있다. 論, 說, 辯에서의 추사의 주창 역시 중언할 필요없이, 확고한 추사의 직도이행적인 예술혼이 한 점의 흠결없이 표출되고 있다. 무릇 학인이란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례를 보이나, 그 논설변이 고루함 없이 명치끝을 꿰뚫는 통렬함으로 오롯하게 스며들어 후학들의 연구 자세를 가다듬어 蘊蓄하게 한다. 추사 학예의 법고창신, 문자향, 서권기, 격물치지, 박학독행 수류화개 이들에게 일맥으로 흐르는 원천적인 힘은 독서이다. 법고가 부실, 희석, 消滅된 영혼에서 창신의 inspiration은 생성될 수 없다. 과거의 흐름이 끊긴 정신문화에는 현재도 미래도 희망은 없다. 오직 추잡함 만이 판을 치는 무례한 금수 무리들의 정신적 육신적 殺生의 난장판만이 시끌법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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