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과 현대교육의 합일: 추사의 평생배움의 源泉 : 法古創新 (1)

clara jeon 2020. 4. 13. 17:07

20200708 박학청논 법고창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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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法古創新

 

   토플러는 [부의 미래(Revolution Wealth)]에서 프로슈머의 비화폐 생산성에 주목하여 공교육을 학교 공장(school-factory)이라고 비판, 미래세대, 즉 컴퓨터 세대의 교육은 개인 대 개인의 학습으로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다([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장승희, 경인문화사:서울, 2014,p290). 이 언급에서의 “변화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함이란 곧 교육에서의 창조의 역할과 희망적인 미래와의 유기적인 필연성을, 교육의 본질을 一貫 한 것이다. 미래세대에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변화란 일시적, 限時的, 편향적으로 생산된 寫出物的인 유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의 본질은 배움의 경험으로서 사고의 전환, 의미 창조이다. 철학적 사고가 가미된 inspiration에 의한 의미적인 창조와 단지 외형상 변화로 先感하는 imitation는 그들의 산출물의 골조, 즉 흔히 말하는 “모방”을 하게 유도하는 기본 틀의 배경적인 요소와 품격에 의해 고정된다. 따라서 모방의 기본의 틀에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interaction과 transaction이 이미 內在, 이들이 창신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모방이란 단지 흉내내기가 아닌, 학예의 역사가 함의되어 있는 총체적인, 통시적인 quality가 흐르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기본 틀, 이는 先覺者들의 창조물, 法古이다. 모방이 된 기본 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유된 법고, 그의 격식과 운치에 의한 창조물의 진정성 있는 영구성은 미래로의 세계로 공명의 빛을 波長 한다.
    추사 예술은 격물치지 실사구시의 법고를 기본 골조로, 추사가 평생 추구한 直道以行의 實事의 삶을 그대로 학예의 지향점으로 창신의 경지로 구현함에 그 본질이 있다. 다시 말해 폭넓은 고전적 경험을 통해 풍부하게 축적했던 격조로 재정해서 매우 절제되고 응축된 형태로 형상화함으로써 결코 올바름을 잃지 않는 전인격적인 경계를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추사와 그의 시대],<추사 그림의 법고창신의 묘경>-<세한도>와 불이란도>를 중심으로, 강관식, p234). 제주 유배지로의 바닷길에서와 같은 백척간두의 삶의 波瀾의 도정에서 추사의 등뼈를 곧추 세운 지지 기반은 직도이행의 불굴의 의지로, 이는 추사의 작품세계에서 양식적, 심미적으로 드러나며, 감상자는 그 공명감으로 추사의 실존과 자존을 읽어내어, 자신의 심상을 이입, 투사, 자신들의 삶을 현실에서 곧추세운다. 예술의 본질적인 역할성이란 그를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난제들로 얽힌 실뭉치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 받을 수 있는 공명감을 불러일으켜, 작품의 심의에 함의되어 있는 작가의 의도와 함께 동행, 삶을 善의 경지로 곧추세워줌에 그 진가를 자리매김 할 수 있다. 명작은 바로 이러한 묘경의 아우라를 양식적으로 심미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추사의 작품들은 대다수 명작으로 현대인에게 회자되어온 내력은, 추사의 작품들이 작금의 삶의 정황 속에서도 당대와 같은 심상으로 추사와 동행할 수 있는 通時의 심미적인 영향력이다. 명작이란 그것이 아무리 <불이선란도>처럼 우연한 붓질로서 얻어진 禪畵라 추사가 說할지라도, 그 우연이란, 작가의 철저한 절차탁마의 장인적인 수련에서 추출된 結晶으로, 그 우연을 우연으로 그냥 녹녹하게 넘기거나 놓치지 않는, 心美. 深味의 감상자가 갈피마다 洗淨한 심미안으로, 작가의 潔淨을 읽어냄으로써 또한 決定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명작들에 내포되어있는 함의성이란 그 形似性에 있는 것이 아니라 神似性 있다. 특히 추사의 작품에서의 명작의 진가는 추사의 실존과 자존의 神似性의 아우라에 있다. <세한도>와 <불이선란도>에서 드러난 추사 내면의 신사의 아우라의 고결함은 물론이거니와 다수의 서예작품들은 추사 心意, 深意의 그림이다. 그래서 추사의 서예작들에서의 글씨들이 그림으로서 읽어지는 書畵一致의 경지인 것이다. 서화일치란, 글씨가 그림으로 읽어진다는 의미는 글씨가 마음을 담고 있다는 뜻으로, 그를 표출할 수 있는 경지는 단지 사물을 닮게 그리는, 그릴려고 노력하는 단지 손끝의 기예로는 성취할 수 없는 高旨이다. 꽃은 빼닮게 그릴 수 있어도 꽃이 피어내는 향기와 그 향기로 정화되어지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는 난해성과 모호성, 暗黙的인 神似의 표현력은 작가의 정신적인 수련에서 結晶, 潔淨되는 것이다. 명작에서 읽혀지는 암묵적인 공명감은 이러한 신사의 난해함과 모호성을 명쾌히 禪으로 喝破함에 있다. 그러하다면 추사가 작품마다 함의로써 명쾌하게 추사의 실존과 자존을 명쾌히 가로 자른 喝의 근원은 무엇일까. 응축하여 명쾌한 한 마디로 法古創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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