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 의미화 <인재론>-과거제도와 대학입시의 폐단(서론-1)

clara jeon 2019. 11. 2. 15:04


20191031과거제도의 폐단.hwp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의 발간과 동시에 확립되었다. 과거는 중국 전한 무제로부터 인재등용을 위한 시험 장치로, 우리나라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역대 중국 왕조의 시행방식을 도입, 독서삼품과가 국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국학생이 관직에 나아가는 등급을 정하는 시험으로 시행되었다. 국가의 제도가 형성되고 정착 확립되기 까지에는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前時代 反體制 人師들의 노고가 年輪되어 있듯이, 고려 광조대에 도입된 과거제도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성골과 진골들에 의해 지배계층에서 밀려난 육두품들이 체제를 개혁해 골품의 열세를 극복하려는 저항정신이 침윤되어 있다. 이들이 관료세력으로 진출하고자 당나라에 유학, 성골. 진골계에 대한 열세를 당나라의 권위와 학문으로 만회하려고 수백년 동안 노력해 온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羅末麗草, 귀국 후에도 진골정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은 지방의 호족세력과 유대를 가지게 되었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으로 건국된 고려조는 이미 정계에 진출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육두품이 다진 권력을 기반으로 고려 제4대 光宗代(재위:949년∼975년)는 성공적인 과거제를 실시할 수 있었다. 이는 호족 출신들의 武人에 의한 고려초기의 왕권 분립을 문신관료들의 문치주의적 관료제도로 왕권의 확고한 권력지지 기반, 즉 골품제에서 관료제도로 왕권강화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건국 무훈공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에게 충성을 본분으로 하는 유학자를 신진인사로 기용하여 왕권강화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 과거제도는 조선초기로 이어져 500년사에 내내 문치주의 위주의 과거제도 맥을 유지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무훈공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緣由로 조선의 과거제도는 문치주의적인 고려조의 제도와 별반 다름이 없다. 단 國是인 유학 본위의 抑佛崇儒 정책으로 僧科를 폐지하였고,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들이 문무양반 관료체제를 갖추려는 뜻에서 공양왕 3년, 1391년 설치한 武科가 실제로 조선시대에 비로소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시가 유학이고 집권층의 사대부들이 文士 위주, 右文左武의 풍조 때문에 무과보다는 문과가 훨씬 중요시, 과거제도에도 반영되어 문과의 인재등용이 부각되었다. 문과 시험 절차 역시 고려조와 유사하여
1 소과 초시 初試 소과 1차 시험
2 복시 複試 소과 최종 시험
성균관 입학 (생원, 진사)
3 대과 초시 初試 대과 1차 시험
4 복시 複試 대과 2차 시험
5 전시 殿試 대과 최종 시험
신분차별이 엄격하고 직업의 가치가 미분화된 조선왕조 사회에서는 양민과 양반들의 立身揚名은 人才登龍門인 과거에 입격하여야 비로소, 관직으로서 권력을 장악하여 사대부로서의 영예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양반가의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자신의 立身出世를 위하여, 생계 유지를 위하여 과거 준비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과거제도가 골품계의 문벌의 집권층을 타개하고 전국 각지 지방 유생들을 비롯한 광범위한 인재를 등용할 수 있었고, 사서오경 등의 시험준비로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등의 인간의 도리를 함양하는 국민들의 人性 純化에 일익이 될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관료에 임직하는 길이 오로지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狹道에 있었다. 더욱이 소과 초시에서 대과 전시까지의 시험에 입격하기 위한 준비기간과 시험기간이 장시간이므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과거시험 준비로 “試場을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氣色조차 쇠락해져 버리니” 국가적으로 인력의 손실이 막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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