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 의미화 <인재설>- 가정. 학교교육의 문제점(3)

clara jeon 2019. 10. 30. 16:11

     추사는 앞의 글에서 서술하였듯이 波瀾萬丈한 삶의 고난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평생을 平心精氣로 薄學篤行한 學生이자 스승이었다. “평생을 버틴 힘이 平生操持力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다 方知學爲福”고 말년을 마무리한 과천시절에 남긴 시 한 편, 이는 추사가 유배 등의 삶의 고난의 날들에서의 터득한 지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한 결 같이 평심정기로 工夫할 수 있었던 근본 터전은 가정에서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추사와 어린시절을 함께 한 백부, 친부 모두 선각한 실사구시적인 사대부로 추사는 그들의 영향으로 科擧에 합격하기 위한 千篇一律的인 종횡무진 傳注와 帖括에 미혹되어버리는 학업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보며 연찬하여 惑世에서도 평심정기 박학독행 수류화개의 평생 배움의 학예인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었다.
      추사의 평생 배움의 여정. 도정에서 교육의 진실성은 무엇인가. 교육의 진실성 상실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여파로 인하여 조혜정이 언급한 현재, 미래에 우리 사회가 톡톡히 치러야 할 그 값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교육정책을 추사의 평생배움의 도정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추사가 살던 시대는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으로 가정은 현대와는 相異한 점이 있을 것이나, 추사가 살던 당대나 작금의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이루어지는 가족 구성원들의 養育의 자리매김은 同質로 동시대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필자의 앞의 글)
       추사의 학예가 현대인에게도 공명을 주는 이유는 추사 삶에서의 사람을 사랑하는 그림이, 形似로서의 실존적 형태에도 아름다움이 있지만 그만으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誠. 形. 著. 明. 動. 變에 구천구백구십구분을 다하고, 남은 일분에 심혈을 다한 至誠(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惟天下至誠爲能化[中庸]23장)의 神似的인 영혼의 영원한 共鳴化의 진가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추사는 현실의 실사를 觀照하지만은 않았다. 인간의 일상에 인간화를 반영하여 서슴없는 直觀으로 신분을 초월하여 환경으로 인하여 한 인간이 비인간화로 경도되어지는 것을 文字香. 書卷氣 등의 全人교육으로 최선을 다하였다. 추사의 학예가 현대인에게도 생동감으로 각성하게 하는 이유이다. 실제의 관찰로 생동하는 살아있는 현실이 없는 관조된 현실만으로 예술이 인간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03, p.330).
      추사는 자신만을 위하여 지고한 격물치지의 학문연찬을 하며 시대의 흐름을 관조만 하는 일개 空理空談 書生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卓上空論을 벗어버리고 직접 일상의 현실에 참여하여 타인의 삶을, 사회를 혁신하고자 한 선각자이었다. 추사는 인간 존엄적인 가치관의 深意, 즉 惟天下至誠爲能化이 교육의 이념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환으로 인재를 발굴, 양성에 지성을 다하였다. 그에게 배움을 청하러 온 인재들에게 각 개인 개성에 맞갑게 혼신을 다하여 지도하는 적천리적인 스승의 모습은 ‘3. 適千里說『藝林甲乙錄』에 나타난 스승의 모습에서’ 정세하게 논지한다. 추사의 인재 양성은 [완당전집] 서문를 쓴 민규호에 따르면 “공이 謫舍에 들어간 뒤에는 원근에서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아 겨우 두어 달 동안에 人文이 크게 열리어 찬란하게 서울의 기풍이 있게 되었으니,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로 보아 제주 유배시절에도 적극적이어서 제주의 인재를 한양으로 유학을 보내 그들을 친가에서 머물게 하며 아들 상우의 보살핌을 받게도 하였다. 이외에 추사가 인재를 양성한 선례는 다음 글 <適千里說>,師弟間의 道理에서 상세하게 논술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