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 의미화 <인재론>-과거제도와 대학입시의 폐단(서론-3)

clara jeon 2019. 11. 2. 15:16

      추사가 18세기의 중후반기, 그리고 21세기,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입신출세의 명목으로 조선의 과거장에, 작금의 수능시험장에 “아무런 보람도 없이 어렵스럽게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氣色조차 쇠락해져 버리는 유생들이나 작금의 “스팩쌓기” 학생들. 평생을 걸고 학문을 연찬할 능력도 공부에는 흥미도 없는 武器, 工器, 商器들을 교실에 모두 함께 몰아 억지로 글씨밥 文器를 먹이려 하니 아이들은 삐딱하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조혜정의 예견, “스스로 ‘주변인’이 되기로 작정한 청소년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들은 우리 사회의 “비통한” 비극적 존재들로 소모품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過剩供給人, 우리 사회의 高級 剩餘人임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舊態依然한 誤導의 길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보면 한국 학부모의 일부 無智 계층은 공부라는 황금을 자녀들에게 먹이고 평생을 편안하게 먹고 살 황금을 낳으라고 자녀들의 삶을 가르는 弊害를,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오로지, 추사 당대의 과거장에 출몰하는 유생들처럼 삶의 목표가 관료직으로 만의 취업의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황금만능의 물질주의 시대라 하면서 아직도 천시되어지는 “4D직업”이나, “흙수저” 등의 운운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文氣 곧 文字香. 書卷氣는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하여 갖추어야 기본적인 교양과목의 덕목으로 추사도 이를 누차 강조하였다. 사람은 인류의 자원이다. 삼라만상 중에 오직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교육은 황금을 돌같이 볼 수도 있는 文氣를 갖춘 지성과 감성의 인성의 생명으로 우주의 생명들에게 아낌없이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 나눔이다. 사람이 사랑을 나눔하지 못하는 인간의 제자리가 아닌 “헬 조선”에 살아가니 武器, 工器, 商器의 아이들은 갈 곳도 막힌 막다른 文器에서 제 길을 잃어, 삶은 죽음의 자리, 참담하고 불행하다. 진실을 외면한 길 아닌 길에서의 가면, “척”하는 회칠을 한 정체성을 상실한, 왜 사는지의 소망의 물음을 잃어버린 수렁 속에서 겨우 四肢만을 허우적거리는, 틀림없이 영원히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찌를 듯 고통스러운 느낌이 내내 지배했을 것이며, 결국 쉼 없는 고통의 피로로 영혼이 망가져 생명 없는 무감각의 상태로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인간성수업], 마사 C. 누스바움, 정영목 역, 문학동네, 파주, 2018, p.249-255). 이제, 학부모와 일선의 교육자와 행정가들은 의식주를 밑밥으로, 더욱이 교육을 미끼로 아이들에게 보호막인 “척”하는 정신적인 살생의 폭력을 그만두고 아이들 중심의, 아이들 나름의 자립터전, 행복을 마련해 주어야 되지 않을까. 하루하루 빌붙어 행복한 척하는 “멋”모르는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필경 그러한 자녀들로 인하여 정신신경과나 그와 유사한 더욱 곤혹스러움의 장애들의 死地로 끌려다닐 것이니 말이다. 한 마디로 교육이란 자신의 정신은 자기 것으로의 자유이다. 정신병은 제 정신을 잃어버리고 남의 언어와 행동을 “흉내내기” 장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