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 (3)

clara jeon 2019. 1. 12. 16:34

위의 글은 1815년 10월 14일자,추사의 장문 서찰에 답한 서간문이기도 하지만 담계는 이때 오직 하나 남아 있던 가장 사랑한 아들 星原 翁樹崐을 잃고 비탄 잠겨 있었다. 슬하에 7남 6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려서 죽고 추사를 만난 1810년에는 두 아들 수배와 수곤 딸 수관이 함께 살고 있었다. 추사는 古藝術物들, 眞本과 眞蹟을 아끼고 연구하기를 즐겨 학식이 넓고 성품이 古雅한 옹수곤과 옹수배 형제와 의기가 투합하여 斷金之交의 학연을 맺고 있었고 특히 추사와 성원은 병오년 동갑으로 더욱 우정이 돈독하였다. 성원은 추사를 깊이 思慕하여 추사의 ‘추’자와 자신의 성원의 ‘성’자를 합자하여 ‘星秋’라고 자신의 호를 새로 지었다. 그러나 수배가 추사와 만난 다음 해인 1811년 세상을 떠났고, 이어 1815년 8월 18일 남은 수곤 마져도 病死하였다. 이들의 우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담계는

노부가 노년에 이런 참변을 당했어도 눈물을 억제하고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만 이 아이가 우리 大雅(秋史)의 정성어린 가르침과 사랑을 받았음을 떠올리면 감정이 복받칩니다. 이 아이는 일찍이 마음깊이 사귀는 친구가 적었고 오직 존형과의 진지한 우의만이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존형도 이 소식을 들으면 슬픔을 감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억누르며 쓴 애통한 내용이 절절히 이어지는,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는 사연으로 추사에게 마음을 풀어내며, 두 달 전에 죽은 아들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長長의 위의 글, 담계는 마음을 추수리며 세심하게 추사의 疑問에 일일이 논리정연한 가르침을 마치 친아들 대하듯이 보낸 것이다. 이 후의 담계의 서간문을 읽어보면 추사에게 향한 담계의 마음 씀이 자식을 모두 잃은 아버지의 상실감을 모두 추사에게 쏟은 듯, 사제간 이상의 소중한 정감이 曲盡하다.([추사 김정희 연구] p.176-178,360)

   담계의 학문은 眞本과 眞蹟을 근거로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토대로 탐구하는 實事求是로 한 치의 先入見이나 空理空論을 용납하지 않는 經學. 金石學. 考證學을 섭렵한 博學이었다. 특히 담계는 자신의 서재 석묵서루에 고서화. 탁본.전적.희귀 금석문 등 8만 점을 수장한 당대 최고의 鑑識家로([완당평전]1,유홍준,p90) 금석에 대한 실증성과 경학의 전문성으로 연찬한 담계의 고증학 연구방법의 독창성은 그의 문하에 섭지선과 같은 특출한 제자들이 연마,담계의 석묵서루는 연경 석학들의 경학과 고증학의 산지였다. 옹방강의 山崇深海의 학예는, 위의 서간문들에 담긴 열정적인 가르침은 “經術文章 海東第一”, 추사의 학예에 내림하여 훗날 추사를 예리한 감식으로 진본과 진적을 가름할 수 있는 金剛眼 酷吏手의 감정가로, 漢宋을 不分한 경학의 섭렵으로, 조선 학계를 顯彰하게 한 대학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위 서간에서의 가르침에서도 담계는 추사에게 철저한 실사구시적인 고증적 탐구,전문성 .독창성 자세를 견지하라고 하고 있다. 한대의 禮學 연구를 시작하고자 하는 추사에게 대유학자인 정현의 글들 조차도 후학에 의한, 添削 歪曲으로, 盲從해서는 안 된다는 極言을 할 정도로,  담계는 장혜언의 [의례도]의 폐단을 예로 들어 학문은 고증으로 체득하여 그 상세함과 정확함에 빈틈이 없어야 후대에 우환이 없다고 단언 한다. 이어서 이러한 실사구시적인 연찬만이 글 한편에서 그것을 통해 옛날 성인이 어떻게 마음을 썼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일갈로 추사에게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더욱이 담계가 지향하는 경학은 청대의 다른 학자들처럼 漢代의 경학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漢宋不分論의 입장에서 송대 경학에 큰 비중을 두고 있어 조선 유학자들이 공부한 송대 철학, 즉 추사의 학문의 경향과도 일맥상통하여 이들은 쉽게 상대를 인정, 소통할 수 있어 담계는 추사에게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는 극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완당평전]1, 유홍준, p.92) “형처럼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며 또 여유가 있고 나이가 젊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충분히 이를 이룩해서 큰 완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귀하께서 옛 서적을 상세히 추적하고 재능과 힘을 길러 힘써 노력한다면 미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의 담계의 인정과 격려 그리고 담계의 고증으로 체득한 실사구시와 漢宋不分論 등에서의 영향은 추사의 학예 경향을 어느 한 학파에 편파적으로 천착하는 연찬이 아닌 博學篤行 山嵩海深의 경지로 정진하게 하였음은 물론이고, 실재하는 진본과 진적을 근거로 철저한 고증으로 분석하는 확고한 고증학적인 학문 입장을 견지하게 하는 <實事求是說>의 골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