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 (2)

clara jeon 2019. 1. 12. 16:27

6. 杜預 주의 잘못
경전을 연구하는 자는 경전을 내버린 채 傳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春秋傳]에 “趙盾이 임금을 시해했다”라는 조항 아래에 左氏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애석하다. 국경을 넘었으면 모면했을 것이다’”라는 내용을 싣고 있다. 이는 좌씨가 성인의 말을 빌려 사관의 말을 정리한 것뿐이다. “그 국경을 넘었기에 적을 토벌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두예의 주는 그 뜻을 오해한 것이다. 그렇지만 후대인들은 오히려 좌씨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그 말이 공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이는 두예가 본직을 체득하지 못한 결과 초래된 일이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당시 子游와 子夏는 단 한마디도 도울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후세에 미루어 짐작해서 억측할 수 있겠는가.

六經 가운데 오직 [詩經]과 [書經]에만 원래 古序가 있다.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믿지 않는다. 성인의 붓끝에서 나오는 경전과 나란히 萬古에 우뚝 서 있는 것으로 [周易]의 <십익>만 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송나라 歐陽脩는 <繫辭>를 의심하며 성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까지 극언하고 있다.

송나라의 유학자들의 경전해석은 義理에 대해서는 더욱 정밀을 가하면서도 訓詁에 의한 것은 한나라 유학자의 사승에 의한 것이기 하지만 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같은 한학에 있어서도 정강성(정현)은 [설문]과 모두 합치하지는 않는다. 허신의 학문은 가류에게서 나왔다. 그럼에도 [설문]에 인용되어 있는 경전 문장은 전부 그를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오늘날 앞서간 성인들을 우러러 보며 이들의 緖言을 엿보고 한마디라도 가름한다면 결국 程朱를 삼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박식을 좋아하는 선비들은 왕왕 한학에 구실을 붙여 변명하고 마침내는 정주의 주장 밖에서 처신하고자 한다. 이는 학자들의 큰 우환이다. 요컨대 마땅히 한학을 널리 아우르고 정주을 위배하지 말아야 한다. 즉 정주학에서 학문의 길을 인도 받을 수 있다. 나의 [附記]에 있는 경전의 수천 수백 조항 역시 대체로 이 같은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10.
형께서 만일 앞사람들의 주장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면 예를 들어 정현의 [노래체협지]와 같은 것은 우선 하나하나 자세히 베껴 노트를 꾸며야 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도 마땅히 注疏의 아래위 문장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文選]에 나오는 左思의 <吳都賦>에 대한 劉逵의 주에 정현의 [易注]를 인용하고 있으나 정현의 역주를 모아 편집한 인물이 유규가 인용한 정현 주를 그대로 놔두고 마침내 유규의 말까지도 정현의 주에 집어넣는 엉터리와 같은 짓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역사를 바라보고 마주할 때는 한 번쯤 이제까지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것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으며,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그때까지 발견된 자료에 근거해 추론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면 후세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자료의 발굴 등을 통해 이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중국사 강의],조관희 저, 궁리출판,2011, 서울.p26) 는, 博學에 의하여 직접 자료를 선별하고 그로 실득한 구체적 증거를 통해 사실을 실증하는 박학.실학 관념의 고증학의 학문적 엄밀성을,10개의 조항에 걸쳐 담계는 세심한 정성으로 주의 사항을 말하고 있다. 당시 완당은 이제 막 한대의 禮學 연구를 시작하고자 할 때였으므로 담계는 특히 이 같은 폐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서 대유학자인 정현의 예를 들어 정현 같은 인물조차 맹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담계는 완당에 대한 기대가 크다면서 이렇게 격려했다. “형처럼 배우기를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며 또 여유가 있고 나이가 젊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충분히 이를 이룩해서 큰 완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추사 김정희 연구] p.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