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遇明, 김노경에 대한 탄핵, 고금도 유배>- 4

clara jeon 2018. 8. 14. 18:18

   1830년 8월 27일 김우명의 私感의 謀陷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순조의 현명한 판단으로 김우명을 파직 시키면서 일단락 되는듯하였다. 그러나 김우명의 삭직으로 안동김문은 추사일문을 죽이기로 안동김문 勢道 굳히기의 파벌적인 정략을 일단락 지을 수 없었다. 이미 효명세가 대리청정 시, 순조와 효명세자 最側近侍인 경주김문에게 정계 도태의 뼈아픈 경험이 있었던 바, 효명세자 장례 이후 향후 순조의 교목세가 선택에 勞心焦思, 안동김문과 그에 유착한 臣僚들은 강주진이 논구한 바와 같이,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다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의 최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한 탄핵이 난무하는, “다른 사람을 탄핵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하는” 정쟁의 정국 세태로 몰고 간다. 순조의 명에 의해 김우명이 삭직된 지 채 보름이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김노경 처벌에 대하여 다시 안동 김문인 대사헌 김양순과 대사간 안광직이 兩司 合啓로 탄핵하였다. 탄핵 내용이 김우명의 상소보다도 그 작태가 참으로 可觀이다.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9월 11일 병인 1번째기사 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양사에서 지돈녕부사 김노경의 처벌을 건의하다


양사(兩司) 【대사헌 김양순(金陽淳)·대사간 안광직(安光直)·장령 권휘(權徽), 정언 성수묵(成遂默)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슬픕니다. 김노경(金魯敬)의 죄를 이루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탐욕스럽고 비루한 성격으로 항상 벼슬을 얻지 못했을 때에는 얻기를 근심하였고 얻고서는 잃어버릴까 근심하여, 거칠고 외람된 습관이 전혀 돌아다보거나 꺼려함이 없어 숭질(崇秩)과 현직(顯職)에 차례를 뛰어넘어 올랐지만 조급하게 승진하려는 마음은 그만두지를 않았으며, 주요하고 풍족한 관아의 일을 포괄적으로 처리하면서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였고, 조카와 사위를 의지하여 성세(聲勢)를 만들고 권간(權奸)과 체결하여 오로지 아첨하며 붙좇기를 일삼으며, 많은 사람이 모인 연석(宴席) 가운데서 제멋대로 사리에 어긋나는 말을 발설하여 김로(金鏴)에게 아첨을 바치는 계책을 삼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생사(生死)를 얻지 못하여 마음을 억제하며 벼슬살이한 지 수십년이라고 말한 것은 의도가 불쌍히 여겨 주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죄가 반역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이란 과연 어떤 등류의 시기였으며, 그가 무엇 때문에 살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기를 바랐어도 얻지 못하여 본정(本情)을 억제하면서 억지로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것입니까?
서유규(徐有圭)가 원통함을 소송한 내용은 바로 이조원(李肇源)의 이미 드러난 옥안(獄案)이었으니, 오늘날의 신자(臣子)된 자가 진실로 당연히 눈을 밝히고 담력을 펼쳐 죄를 성토(聲討)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의금부의 당상관이 되어 곡진한 뜻으로 엄폐하고 비호한 것은 이미 극도로 무엄(無嚴)한 짓이며, 더욱더 몹시 가슴 아프고 한탄스러운 것은 지난 기묘년 여름에 명문(名門)을 간선(揀選)하고 이에 대례(大禮)를 정하였음으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경축(慶祝)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 무슨 마음으로 크게 불만을 품고 앞장서서 흉측한 말을 하며, 역적 권유(權裕)가 남긴 투(套)를 온전하게 답습하여 전설(傳說)을 너무 퍼뜨렸기에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더욱 격렬해졌는데, 지금에 와서 뒤따라서 생각하여 보면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집니다. 그의 부범(負犯)을 논하면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운데 왕법을 아직도 늦추어서 편안하게 호흡하기를 아무런 일도 없었는 듯이 하고 있으니, 국가에 떳떳한 형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잠깐 동안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지돈녕부사 김노경을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하여 전형(典刑)을 쾌하게 바로잡도록 하소서."

○丙寅/兩司 【大司憲金陽淳, 大司諫安光直, 掌令權徽, 正言成遂默。】 合啓以爲, "噫嘻! 痛矣。 金魯敬之罪, 可勝誅哉? 貪鄙之性, 常患得失, 麤濫 習, 全無顧忌, 躐躋崇顯而躁進不已, 兜攬要膴而惟利是趨, 倚姪壻而作爲聲勢, 締權奸而專事謟附, 宴席稠會之中, 肆發悖說, 以爲納媚金鏴之計, 其所謂生死不得, 抑情仕宦於數十年云者, 意出乞憐, 罪關無將。 數十年之間, 是果何等時, 而渠以何故, 求生不得, 求死不得, 抑其本情, 强爲仕宦耶? 徐有圭訟冤之辭, 卽肇源已著之案, 則爲今日臣子者, 固當明目張膽, 聲罪致討。 而身爲禁堂, 曲意掩護者, 已是無嚴之極, 而尤有所萬萬痛惋者, 粤在己卯之夏, 揀選名門, 爰定大禮, 一國臣民, 莫不慶祝。 而渠獨何心, 大懷不滿, 倡爲凶言, 全襲裕賊之餘套, 傳說已播, 輿憤愈激, 到今追惟, 毛骨俱竦。 論其負犯, 萬戮猶輕, 而王章尙稽, 偃息自如, 其可曰國有常刑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