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遇明, 김노경에 대한 탄핵, 고금도 유배>- 3

clara jeon 2018. 8. 14. 18:12

而乃敢自居甚高, 動稱士類, 隨事憂歎, 眞若有識者然, 誠不滿一笑也。 然而下段所論, 不過薄物細故, 惟是抑情仕宦之說, 掩護凶逆之實, 不可不快正典刑。 伏乞亟賜處分, 以謝一世焉。"

위와 같이 김노경에 대한 뚜렷한 죄목이 보이지 않는 私感의 謀陷인 이 상소는 안동 김문인 김우명의 眞意를 의심스럽게 한다. 순조 역시 김노경의 확실한 죄목이 명변하게 기재되지 않는, “그의 요사스런 자식”이라 칭한 추사에게 파직당한 앙갚음과 추사 일문을 겨누는 私感의 탄핵에 오히려 김우명의 削職을 명하며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 서백(西伯)의 일을 그대가 나열하였는데 과연 모두 그대가 듣고 본 것인가? 중신(重臣)의 처지는 자별(自別)한데 어찌 이럴 수가 있으며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심지어 자식과 조카를 논급(論及)하였는데 또한 어떻게 미워하기를 이렇게 심하게 하는가? 대저 시각(時刻)을 다투며 상변(上變)해야 할 일이 아닌데 그대가 전함(前銜)으로서 갑자기 몸을 빼어 서둘러 상소를 올린 것 또한 오늘날의 풍습이니, 이러한 풍습은 자라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를 삭직(削職)하게 한다."
하였다.

批曰: "前西伯事, 爾所臚列, 果皆爾所聞見乎? 重臣處地自別, 寧有是也? 寧有是也? 至於論及子姪, 又何疾之已甚乎? 大抵旣非時刻上變之事, 而爾以前銜, 突地挺身, 汲汲投章者, 亦今日風習也, 此習不可長。 爾則削職。"

그러나 김우명은 종6품 무관직 副司果에서 삭직된 불과 1년 후 왕의 자문기관, 言論三司 중에 하나인 홍문관 부수찬에, 그리고 驚異의 보임은 1839년, 정 3품 청요직 *사간원의 수장 대사간으로 제수된다.(*각주,헌종실록 6권, 헌종 5년 6월 17일 신사 1번째기사 1839년 청 도광(道光) 19년
이경재·이약우·김우명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경재(李景在)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약우(李若愚)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우명(金遇明)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辛巳/以李景在爲吏曹參判, 李若愚爲司憲府大司憲, 金遇明爲司諫院大司諫)
국왕 순조의 비답 “어떻게 미워하기를 이렇게 심하게 하는가? 대저 시각(時刻)을 다투며 상변(上變)해야 할 일이 아닌데 그대가 전함(前銜)으로서 갑자기 몸을 빼어 서둘러 상소를 올린 것 또한 오늘날의 풍습이니, 이러한 풍습은 자라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대를 삭직(削職)하게 한다."의 분노를 산 상소로 파직당한 김우명이 불과 1년 만에 왕의 近侍로 지제교를 겸대하며 왕의 교서를 대필하거나 역사를 기록하는 淸華職인 홍문관 부수찬으로 복직, 그리고 8여년 만에 요직 중에 요직 사간원 수장 대사간 임직은 당대 순조의 統治權을 無視, 越權한 안동김문의 인사정책에서 전횡의 위세를 감지할 수 있다.
    더욱 더 可히 疑訝한 사건은 김우명이 대사간으로 보임을 받은 1년 후인 1840년 9월 윤상도의 옥사로 추사가 제주도로 위리안치의 유배의 명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기록되어지지 않는 역사의 행간 사이에 은밀히 숨어있는 의구심에 대하여 강주진은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한다리 김씨와 적대 관계에 있는 장동 김씨는 정치적 기반이 불안해져 추사 일문의 출사를 경계하여, 추사가 한때 충청도 암행어사로 갔다가 비인 현감으로 있던 김우명의 비위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는 바가 있었는데 부사과가 된 김우명으로 하여금 추사의 생부 김노경을 탄핵했다”라 간파하였다.(姜周鎭, 僻派家門 出生의 秋史 金正喜 : 濟州 流配動機를 중심으로, 탐라문화, Vol.6 1987, p44-45). 김우명이 상소를 올린 1830년, 64세인 김노경은 평안감사에서 막 물러나 있었고, 추사는 45세로 규장각 대교를 거쳐 同副承旨로 在任하고 있었다. 그러하다면, 末端인 五衛의 종6품 부사과 김우명이 현임 동부승지 김정희가 아들인 전 평안도 감사에서 막 물러난 김노경을  탄핵 상소한, 왕가의 近戚 월성위가 경주김문을 감히 犯接할 수 있도록 부추긴, 그리하여 경주김문의 웃어른 首長인 김노경을 고금도로 유배 보낸, 더욱이 不美스런 상소로 순조에게 파직 당한 김우명이 1년 만에 복직 9년의 단기간에 청요직 사간원의 장관, 정3품 당상관직 대사간까지 승승장구, 안동김문의 파벌당들인 삼사와 협잡하여 결국 1840년, 윤상도 옥사사건으로 추사를 孤立無援 위리안치 제주 유배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한, 이 일련의 사건, “추사 일가 죽이기”의 안동김문의 圖謀는 수십 년에 걸친 집요한 안동김문의 정략이었다고 필자 역시 推斷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