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완복이 추사에게 보낸 서찰로 “애틋한 이 마음 그쪽으로 가서 더욱 그립습니다”라고 사모의 정을 서두로 인사하고, 부친 운대의 근황과 안부를 대신하면서, 또한 추사의 학연 유희해와 주야운의 소식, 그리고 [황청경해]를 언급 하고 있어 추사에게 향한 완복의 자상한 마음씀을 읽을 수 있어 일부를 발췌한다.
저의 아버지는 지난해 가을에 황명을 받잡고 내각에 들어와 운남과 귀주를 다스렸으며 금년 봄에는 황제께 보고하러 3월 초순 기한에 올 수 있을 것인데 당연히 주신 2가지를 전해 올리겠습니다. 저의 형(소운)은 이미 영평지부를 거쳐 청하의 관찰사로 발탁되었습니다.
유연정 형은 이미 외직에 나가 정주지부가 되었는데 북경에서 약 6천여 리나 떨어진 곳입니다. 주초당 부헌과 주야운 옹은 수시로 왕래하십니다. 주야운 옹은 여전히 원기 왕성하시며 涵秋閣 중에 수시로 글과 술이 곁들여진 연회에 참여하여 귀하께서 쓰신 주련을 대할 때마다 정신적인 교류가 다하지 않아서 반드시 야운옹이 重陽圖를 펼치며 주초당 ‘완당’이라고 쓴 두 글자 및 예서 대련에는 늦게 회답한 데 대해 용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황청경해]는 이미 잘 검수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그중에 오자와 탈자가 매우 많은데 대개 그 책을 판각할 때 저의 아버지는 이미 兩粤을 경유하여 관작을 운남과 귀주로 옮겨서 교열을 친히 감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추사 김정희 연구] p.724-726)
위 편지글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함의에서는 제자 추사를 아끼는 스승 운대의 애정이 예를 갖춘 소운을 통하여 多情多感히 고여 있다. 운대의 두 아들 상생과 복이 부친의 마음을 짐작하여 추사에게 그 아낌을 그려내고자하는 배려의 마음, 그리고 추사를 향한 흠모의 정이 高雅스러워 이들의 우정이 단지 학문의 연찬만을 위한 교유가 아니라 天涯知己 友誼였음을 읽을 수 있다.
추사의 학문 연찬에서의 연경학계의 교류, 특히 담계와 운대와의 사숙은 추사가 추구할 학예의 길에 樸學的인 山嵩海深의 경지로 이끌어 주었다. 추사와 연경의 석학들과의 교류는 당연히 담계와 운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운대의 아들 소운은 물론, 담계의 아들 성원 등과의 서신으로 맺어진 斷金之交를 계기로 葉志詵, 吳崇梁,汪孟慈, 李璋煜 그리고 훗날 우리나라 금석문집인 [海東金石苑]을 편찬한 燕庭 劉喜海, 등으로 학연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동기, 즉 淸朝 嘉慶. 道光學壇의 碩學大儒들이 보내온 手札, 尺牘, 書冊, 한묵 등은 추사를 성리학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조선 학예문화에서 開眼,금석학적,실사구시적인 고증학,경사학적 추사 학문의 경지를 조선후기의 학예계를 주도하고 있는 청조학예에 博學한 석학으로 평가,인정받게 하였다. 더욱이 추사는 외국 문물에서 배운 지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요즘의 賤流 해외파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오늘날에도 귀감이 되는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아, 추사가 열어놓은 이 길로 눈푸른 학예인들이 뒤를 따랐다. ([완당평전]1, p.105) 추사는 文字香. 書卷氣를 지향하는 淸高古雅한 문인적인 詩書畵의 일치, 그리고 청조의 석학들과의 학문의 나눔으로 섭렵한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하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실사구시적인 학문 연찬으로, 새로운 학문과 예술 사조, ‘완당바람’을 일으킨, 조선 후기 신학문의 파장을 일으킨 선각자였다.
그러나 후일, 추사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題하여 담계와 운대를 회상하며
담계는 “옛 경전을 즐긴다”고 말했고 운대는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하였으니 두 분의 말씀이 나의 평생을 다한 것이다.(전집 권6 <自題小照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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