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 9

clara jeon 2018. 9. 17. 17:41

서법은 醴泉銘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이미 趙彛齋 때로부터 예천명을 楷法의 圭臬로 삼았으니 그때에 어찌 右軍書의 황정경. 악의론이 없었으랴마는 다 돌고 돌아 飜訛되어 준칙을 삼을 수가 없으니 原 石搨에서 진적을 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때문에 부득불 머리를 숙이고 예천. 化度 등 碑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화도는 지금 원석은 없고 宋搨으로 范氏書樓本 같은 것은 동인이 더욱 얻어 볼 수가 없는 것이나 오히려 예천의 원석 탑본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설사 많이 낡고 부스러졌다 해도 이것이 아니면 鍾索의 옛 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어찌하여 이를 버리고 딴 것을 구한단 말이냐.
네가 말한바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 글자가 따로 놀아 마침내 歸一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네가 문에 들어갈 수 있는 進境의 곳이다. 모름지기 潛心하고 힘써 따라 꾹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만 쾌히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니 절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退轉하지 말고 더욱 더 공덕을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육십 년이 되어도 오히려 귀일됨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너 같은 초학자이겠느냐.
그러나 나는 너의 이 말을 듣고서 매우 기뻐하며 반드시 소득이 이 한 말에 있다고 여긴다. 절대 범연히 보고 부질없이 지내지 말아야만 妙諦가 될 것이다.
隸書는 바로 서법의 朝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그 법은 반드시 方勁과 古拙을 上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 졸한 곳은 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漢隸의 묘는 오로지 졸한 곳에 있다.
史晨碑는 진실로 좋으며 이밖에도 禮器. 孔和. 孔宙 등의 비가 있다. 그러나 蜀道의 여러 각이 심이 古雅하니 반드시 먼저 이로 들어가야만 俗隸. 凡分의 膩態와 市氣가 없어질 수 있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 속에 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 속에 文字香과 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腕下와 指頭에 발현되지 않으면,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 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張本이며 예를 쓰는 神訣이 된다.
근일에는 曹知事 兪綺園 같은 諸公이 예법에 깊으나 다만 文字氣가 적은 것이 한스러운 것이다. 李元靈은 예법이나 화법이 다 문자기가 있으니 시험삼아 이를 살펴보면 그 문자기가 있는 것을 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해야 할 것이다. 집에 수장된 예첩은 자못 구비해 있다. 西狹頌 같은 것은 촉도 諸刻의 극히 좋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畵蘭에 있어 오래도록 작자가 없었는데 오직 先廟의 御畵를 보니 天縱의 聖으로서 잎 부치는 식과 꽃 만드는 격이 鄭所南의 법과 흡사하다. 대개 그때에 송나라 사람의 난법이 우리나라에 流傳되었는데 역시 어화도 그를 臨倣한 것이다. 소남의 그림은 역시 중국에도 드물게 전하며 근일에 익히는 것은 또 元. 明 이후의 법이다.
비록 그림에 능한 자는 있으나 반드시 다 蘭에 능하지는 못하다. 난은 畵道에 있어 특별히 한 격을 갖추어 있으니 가슴 속에 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는 것이다.
봄은 무르익어 이슬은 무겁고 땅은 따뜻하여 풀은 돋아나며 산은 깊고 해는 긴데 사람은 고요하고 향기는 뚫고 든다.
옛 사람은 난초를 그리되 한 두 종이에 지나지 아니하며 일찌기 여러 폭을 연대어 다른 그림 같이 하지 않는다. 이는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난화를 요청하는 자들은 이 경지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서 혹은 많은 종이로 심지어는 八疊을 强請하는 자도 있지만 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사절할 따름이다.([완당전집] 제7권, <雜著>,書示佑兒, p.337-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