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 6

clara jeon 2018. 9. 17. 17:26

    개인과 개인이 주고받은 편지글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극히 사적인 나눔으로 전반적인 실생활의 모습과 인생관 등 인간의 됨됨이가 진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한 가정의 양육 상태 파악은 가족 간에 교류한 편지글에서 探知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김노경과 추사의 서독에는 가족 뿐만 아니라 친족들과도 나눈 진솔한 편지글이 다수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秋史家의 가문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의 글에서는 부부간, 형제간, 친족간의 도리와 애정, 우애, 사려 깊은 관심 등의 가족사가 드러나 있어 한 인간의 인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상관관계성 요인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이 글의 일단락을 위하여 김노경과 추사가 가족들에게 보낸 서간 중에 가정의 화목과 교육에 관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추사가 평생을 평심정기 박학독행하게 된 동기부여를 총체적으로 연계하여 논지한다.

伏不審潦炎 氣候若何伏慕區區子侍讀 一安伏幸 伯父主行 汣今離發兩意未 己日熱如此伏悶命第 幼妹亦好在否與否備伏惟 下監 上白是 癸丑流月初十日子正喜是白

굽어 살피치 못하는 불볕 여름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리운 마음이 절절하오나 소자는 독서에 여념 없이 편안하오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부님께서 이제 행차하려시오나 장마도 그치질 않고 더위도 여전하니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어린 여동생과 아우는 잘 있는지요.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오니 굽어 살펴 주십시오. 계축년 유월 초열흘 소자 정희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유홍준,[완당평전]1,p43)

위의 서독은 추사의 소년기의 의젓하고 기품이 엿보이는 편지로 월성위궁 백부 김노영에게 養子로 들어간 추사가 여덟 살 즈음, 예산에 계시는 생부 김노경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접어두며, 인편이 있어 급히 써 보낸 종손의 예의바른 안부편지이다. 민규호가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라 하였듯이 추사는 세 살 아래인 산천 김명희와 아홉 살 차이인 막내 아우 김상희 두 아우와의 우애가 남달리 돈독하여, 부친의 유배, 추사의 유배 등 집안이 고난을 당할 때에도 늘 함께 하였고, 이들 형제들은 모두 시와 글씨에 뛰어나, 두 아우 모두 추사의 글씨를 빼박은 듯이 써서 낙관이 없으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여서 실제로 김명희는 추사의 많은 글을 代筆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홍준,[완당평전],1. 44-45) 추사는 효성 또한 지극하여 민규호는 “부친 판서 휘 노경은 의연하게 도량이 있었는데 家禍를 만나 먼 섬에 유배되자, 공은 슬퍼서 살고 싶지 않았고, 밤이면 반드시 잠도 자지 않고 울면서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추우나 더우나 옷도 갈아입지 않다가 판서공이 4년 만에 풀려 돌아오자 공 또한 4년 만에 비로소 옷을 갈아입었다.([완당전집] 민규호, <완당김공소전>, p.11) 또한 부친 김노경이 고금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두 차례의 걸친 격쟁에 대한 언급을 앞의 글에서 서술하였듯이 추사의 지극한 효성은 사대부가의 선비로서 나무랄 데 없는 父子有親, 人倫道理였다. 이러한 추사의 지극정성 효성을 後學 宗人 金承烈은 추사 死後 82년 후인, 1936년, 주변 원로들과 종친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비문에 기록하였다.

선생의 효성과 우애는 하늘이 내셔서 부모와 백숙부모를 모실 때 지극히 정성스러워 조금의 틈도 없었다. 유당공이 귀양 갈 때 선생은 애통한 나머지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밤이면 반드시 울면서 하늘에 빌며 잠을 자지 않고 추위나 더위 때에도 한 옷만을 입고 갈아입지 않았다가 풀려나 돌아오시고서야 그만 두었다. 만년에도 삿갓을 쓰고 등불을 들고서 한밤중에 맨발로 궐문 밖에 엎드려 官爵의 회복을 호소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정사년(1857)에 비로소 요청대로 되었으나 선생은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였다.([추사연구] 제2호,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김승렬 저, 이선경 역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