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제주도위리안치 (윤상도의 탄핵 상소)- 22

clara jeon 2018. 8. 20. 19:14

   






이와 같이 “유배 온 지 몇 달 만에 궁벽지를 文彩나게” 하여 “탐라의 거친 풍속”를 깨우친 추사가, 늘 “장날같이” 제주의 학인을 교화하는 녹녹한 일상의 삶을 營爲한 것만은 아니다. “탐라의 거친” 환경, 추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毒雨 . 毒熱. 毒風”, 즉 풍토의 나쁜 기운, 이른바 瘴氣 때문에 고생이 심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병추기로 고통을 겪었으나 “못살포”에는 약도 의원도 없어서 곱의 징역살이를 하였다.([완당평전]1,p361-362)*吳狀一如前邈樣而痰嗽急氣不旋之時血症拜發無非瘴濕爲崇水泉不佳積鬱痞滿不散眼花有加無減春瘴又早作不能耐瘴較益甚焉恐無以支吾矣: 나의 상태는 일체 이전과 같으나 가래 기침이 크게 더쳐서 그 기침이 급하여 기(氣)가 통하지 않을 때는 혈담(血痰)까지 함께 나오는데, 이는 모두 장습(瘴濕)이 빌미가 된 것이네. 게다가 물도 좋지 않아 답답한 기운이 뱃속에 가득 차서 풀리 지 않고, 눈이 어른어른한 증세도 더하기만 하고 줄지를 않네. 봄 장기가 또 일찍 발작하여, 장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하니, 아마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듯 하네([阮堂全集],卷二, 書牘, 與舍季相喜). 추사가 가족, 친지에게 보낸 서간문에는 병추기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내용이 다수인 것으로 보아 9여 년의 유배생활 대부분을 아프지 않은 데가 없이 보낸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병고의 장애를 추사는 끊임없는 학예탐구로 자아를 탐구하며 절도위리안치의 고독과 울분, 분노를 정화하며 승화하여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며 심리적인 안정, 즉 박학독행평심정기로 오히려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水流花開, 예술성의 승화로 극복하였다.
    추사는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어떤 삶의 여정을 선택해야하는가?’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옅고 짙은 묵선으로 색감으로 형태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심적인 평화스러움의 회복은 정신적, 물리적인 ‘가시 울타리’와 ‘섬’을 너머 예술문화의 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백의 창구를 편지글들에 열고 담아 고립과 단절을 피할 수 있었다.(필자 논문,[세한도]에 침윤(浸潤)된 미술 치유성) [완당전집]에 실린 글 대부분은 書牘이다. 추사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내는 이 서간문들에 자신의 상태를 솔직담백하게 하소연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추구하는 학예의 경지를 토로하여, 絶島와 바깥 세상의 통로인 이 서간문들은 단순한 안부편지가 아닌 학술적으로도 문학, 철학적으로도 긴요한 연구 자료이다.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조선의 선비들이 학예로 몰입하여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완당평전]1. p379) 추사의 제주에서의 만 8년 3개월, 햇수로는 9년의 絶島 圍籬安置 귀양살이는 極寒의 환경을 극복한, 學藝의 산과 바다의 높고 깊음을 헤아리는,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學藝의 길, 그 穿鑿의 歲寒이었다.
    추사에게 해배의 소식이 전해진 날은 1848년 헌종 14년 12월 19일, 추사는 이듬해 1월 7일 대정의 적거지를 벗어났다. 이 뜻하지 않는 放送의 표면적인 동기는 이 해가 대왕대비 육순, 왕대비 망오, 순동 추상존호, 대왕대비 가상존호, 익종 추상존호, 왕대비 가상존호 등 여섯 경사가 겹쳐 六慶 에 대한 六赦를 내려 추사가 사면의 대상이 되었으나, 실은 그 배후에 추사가 백척간두의 한계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마음 씀, 정성을 다한 知己之友인 권돈인과 조인영, 그리고 추사의 文人, 畵人 제자들인 신관호. 소치. 조희룡 등이 헌종의 측근에서 적극 주선하여 임금의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였기 때문에 석방이 성사 될 수 있었던 것이다.([완당평전]1. p50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