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15)

clara jeon 2018. 7. 31. 17:48

   김조순은 金昌集의 4대손으로 1785년 정조 9년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정조는 金尙憲의 후손인 김조순이 문과에 입격하였을 때 이미 그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의 등과를 기뻐 반가워하며 ‘풍고(楓皐)’라는 호를 내려주고 심지어 낙순(洛淳)’이었던 이름을 ‘조순(祖淳)’으로 바꾸어 지어주어, 김낙순은 김조순으로 정조의 총애를 입으며 정조의 최측근 近密人으로 보좌하였다. 그리고 초계문신, 규장각 대교로 발탁, 정조 16년에는 동지 사은사의 書狀官으로 연경을 방문하였다. 관직으로는 청요직인 양관 대제학, 직각 그리고 이조 참의 승지, 총융사 등을 임직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총애는 정조의 탕평의리와 김조순 가문의 절의와 일맥상통한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명가의 교목세가를 등에 업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의 정략과, 친왕파로서 왕의 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는 장동김문과 상부상조의 勢道의 구도를 구축하였다. 이처럼 정조의 교목세가의 교목세신으로서 김조순은 순조 헌종 철종대의 세도정치 60여 년사의 서막을 열게 되었고, 더욱이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로 간택되고, 정조가 세자의 보덕을 당부하고 1800년 6월 서거하자 김조순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 졌다. 주도면밀한 김조순은 정계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시에도 고도의 정략으로 정책 결정에 관여, 장동 안동김문들이 군권을 장악하거나, 조정의 주요직을 포진하게 하는 등, 정국을 주도하여 장동 안동김문을 교목, 권문세가의 명목을 지탱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조순의 졸기를 보면 그가 國舅로서, 비변사, 삼사, 더욱이 병권을 장악한 세도가로서의 면모, 외척세도기 내내 영향력을 발휘한 행보를 추이할 수 있다.

김조순의 졸기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 왕비(明敬王妃)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 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 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德)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正宗]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기사 1832년 청 도광(道光) 12년)


祖淳, 忠獻公 昌集玄孫, 而明敬王妃之父也。 容儀秀美, 器識宏達, 自少已卓然自拔於流俗之外, 弱冠登第, 久處邇列, 以公直無隱, 受正廟深知, 特以他日輔幼之責托之。 及妃膺再揀, 而正廟禮陟, 貞純大妃, 因先王遺意, 擢授戎垣, 時世道艱危, 不爲之撓, 及大婚成, 上遂虛已任之。 祖淳旣處肺腑, 內贊密勿, 外任彌綸, 殫誠竭忠, 身佩安危者, 三十餘年, 惟以保護聖躬, 成就君德, 持守精義, 扶植善類, 爲一副追報之道, 用能篤棐我郅隆之治。 於是朝野翕然, 謂 ‘君子之茂德焉’, 文章之高世餘事耳。 然素性過於仁厚, 篤好人倫, 故其流也或至於泛博, 又謹愼之至, 事多循常, 蓋不以功業自居也。 後因廷議, 追配正宗廟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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