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14)

clara jeon 2018. 7. 31. 17:46

   반면 안동 김문이 시파로서의 당색을 본격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정조대이다. 이글에서는 안동김문 세도기에서의 金昌集의 4대손인 金祖淳의 역할을 조명해야 하므로, 김창집계 장동 안동김문을 부각하여 기술한다. 장동 김문은 조선 전기 정치계에서는 권세가 미미한 지방 사족의 일원이었으나 선조대에 斥和義理의 家風과 宗風으로 사림 명문의 반열에 오르고 중종대에는 성리학적 지향의 가풍과 종풍으로 중앙의 사림 명족으로 성장하였다.(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p13) 세간에 회자되어지는 척화파 김상용. 김상헌 형제는 선조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정계에 출사하여 병자호란 시의 殉節과 斥和로 장동 김문의 家風과 宗風으로서 義理의 궤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안동 김문계의 명망과 특권을 성취하게 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숙. 경종대에 김창집은 영의정 등 고위 관료 임직, 숙종의 탕평에 공감하면서도, 그러나 私議로 경도되어 있는 숙종에게 군주가 공론에 입각하여 시비명변한 뒤에 공의에 부합한 붕당을 써야한다는 의리탕평을 강조(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p114), 숙종에게 경각심을 주었고, 그리고 김창업은 형 김창집과 정사(正使)로 연경을 방문, 조선만의 한정된 시각이 아닌 開眼한 관점으로 국제적인 정세를 인식한 [연행일기]를 저술하는 등, 이들 형제는 節義와 文章으로 장동 김문을 명문세가로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그러나 경종대에는 기사사화와 신임사화, 즉 연잉군을 왕세제로 옹립하고 대리청정을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경종이 즉위함으로써 김창집. 김제겸. 김성행 삼대가 賜死를 당하는 家禍로 정치적 시련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기간을 후손들은 오히려 은거지에 침잠하여 학문을 연마, 道學을 自得, 節義. 文章. 道學의 조선선비의 이상형인 世德을 갖춘 가문으로 喬木世家의 근본을 다지게 되었다. 장동 김문이 다시 본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한 시기는 그들이 옹립하고자 했던 왕세제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 한 후의 신임환국이다. 이 환국으로 사사되었던 선조들은 복권되었으며 영조 후반기에 시작된 이들 장동 김문 인사들의 출사는 정조대에는 정조의 적극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정계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면서 가문은 더욱 더 현창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정조의 “현명함은 개인의 자질이 우선이긴 하나 가문에 흐르는 世德은 또한 무시 할 수 없으며 김상헌 이래 쌓아온 도덕과 명절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따라서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는 의리가 있다”는 賞讚으로 이들 장동 가문의 節義를 재조명함으로써, 이들이 당한 기사. 신임 가화의 피해의식을 말끔히 씻어주어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실은 정조에게는, 장동 김문의 가풍인 척화의리의 含意가 정조의 의리 탕평과 부합함으로, 이들 장동 김문 출신관료들을 자신의 近衛勢力, 喬木世臣으로 육성하려는 목적이 階梯되어 있었다.(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p133) 정조는 각 붕당의 청류를 등용하여 영조 후반에 강화된 척신계를 숙청하고 뚜렷한 이념 성향을 지닌 붕당의 형성을 위한 입장을 내세웠는데, 그 이념은 時議論으로, 풀이하자면 국왕의 의리 기준에서 명의와 청론을 재해석하는 ‘時’, 여기서의 ‘시’란 시령. 시군. 시중으로 이들의 반대 개념으로는 첫째, 하늘을 거스르는 것 둘째, 나라를 배반 하는 것 셋째, 성인의 죄인이 되는 것으로 제시, 이 時議에 동참하면 ‘忠’이요 거부하면 ‘逆’으로 ‘시’에 앞서거나 뒤쳐지는 것을 토죄할 것이라 하였다.(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p.137) 이러한 전제 하에 정조는 장동 김문 이야말로 실로 이전에 찾아보기 힘든 이 시의에 맞춤 名閥 이라하면서 이들을 교목세가로 육성하였으며, 또한 정조의 구상과 의리탕평에 공감한 장동 김문은 ‘時派’로서 정치 노선을 확정 지우며, 정조의 척신 세력으로 사대부 명가의 세도 가문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면서 세도정치기의 인적 구성 기반을 이미 정조 초반에 구축하였다.(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p143). 위와 같은 정조의 과도한 장동 김문에 대한 보호막은 결국 국가의 위태로운 시기에 節義로 상징되는 안동 김문을 외척세력으로 전환, 勢道家로서의 立地를 굳히게 하는 계기되었다. 더욱이 정조의 이러한 장동 김문에 대한 편파적인 지지와 지원은 후반기에 들어 漸入佳境이 되어 장동 김문을 제외한 유력성관들을 정계에서 배제, 도태 시켰으며, 견제 세력이 없는 派閥一黨, 장동 안동김문은 국정 인사권 장악 하는 등 勢道의 독란은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척세도기를 始發하게 한, 주도적인 인물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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