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秋史는 事大主義者였을까 아니면 愛國者였을까.

clara jeon 2018. 2. 3. 20:09


<이 새벽에 이것이 알고 싶다, 秋史는 쪄든 事大主義者였을까 아니면 愛國者였을까.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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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조선 서화계의 매너리즘을 직시하고 있었다. 추사는 天崩地解로 比肩되는 명조 멸망의 여파로 조선의 小中華라는 주체의식으로 인한 섣부른 토착화로, 조선 서화계가 玩物喪志, 俗師 魔界, 즉 천박한 俗化가 만연하리라는 것을 예지하였다. 더욱이 西器 賤流의 문화의 파고가 조선을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예견하여 추사는 진보적인 지식층, 특히 우선 이상적. 추재 조수삼. 대산 오창렬. 소당 김석준. 역매 오경석 등 개화파적인 중인들, 암울한 조선을 개벽할 수 있는 인재를 그의 문하에 포진하게 하고,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고차원 文人的 理想이 담긴 글씨와 그림을 지도하여 신선한 학예풍의 예술사조로 예단을 이끌었다. 이동주를 비롯한 후학들에 의하여 명명되어진 ‘완당바람’, 당대에 일세를 풍미한 이 波高에는 단지 학문 탐구의 한 방법론이었던 청조의 금석. 고증학을 한 차원 끌어올린, 새로운 시대사조로 전환기의 길을 연 추사의 선각적인 예지일탈의 선견지명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추사는 조선 후기에 조선 학예의 경지를 무너뜨릴 수 있는 眞景, 허울의 조선화 俗氣스런 賤棄 흐름, 문자의 향기가 없는, 書卷의 맑은 기운이 희석, 상실되어가는 濁流化에, 신지식인 금석고증학과 문자향. 서권기의 淸流가 흐르게 하여 至高한 조선 고유 문화로의 회귀, 改化. 開化의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이는 혹자들이 지엽적인 의견으로 분분하는 구문화 체계로의 회귀가 절대 아니다. 추사는 당대에 보기 드문 개화한 선각자이면서도 조선선비 지조의 명분을 잃지 않은 당대의 석학으로, 신분을 초월하여 차별없이 제자를 지도한 실사구시적인 신지식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高踏的이고 固陋한 공리공론의 성리학의 폐단으로 인한 조선후기의 末端을 전망하고 예측한 추사가 개화의 바람을 저버리고 전시대로 회귀할 리가 없는 것이다. 추사는 그의 인생관, 학예관에서의 人道의 道心은 直道以行, 實事求是, 平心精氣 博學篤行으로 그 道의 밖, 人道. 道心 밖의 길, 賤棄, 卑賤 마귀의 경지로의 誤導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淺薄, 卑賤의 誤導가 人道. 道心을 피폐한 파멸로의 길로 誘導함을 추사의 당대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미 짐작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추사는 조선말기 사농공상의 신분차별이 와해되고, 정신적인 가치관보다는 물질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종말론적인 속기로 내달리는 풍속 속에서 천민화되어가는 조선의 백성들을 보며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자신의 위치에 自愧感에 젖어들었을 것이라 추단한다. 밀려드는 西勢로 빠르게 東漸되어지는 조선 후기, 한 지성인이 봉착한 문화의 자아상실의 싯점에서 추사는 조선의 학단과 예단의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풍토로는 서세동점의 물결에서 조선인의 삶은 급기야는 균열 될 것이라는 절박함을 예측하였을 것이다. 추사의 대응책은 실사구시적인 학문과 예술의 덕행으로서의 지도 계층의 의식 전환이었고, 그 선두에 이미 無用之物化 되다 싶이 한 양반 계층보다는 앞으로의 세대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전망한 중인계층들에게 실사구시적인 고증학. 문자향과 서권기가 浸潤된 文人畵 등을 지도하며 學道와 藝道의 길을 동행하였다. 위태로운 인심과 도심,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조선의 운명을 살리는 길은 실사구시적인 신학문인 청조 금석 고증학과 堯舜禹湯文武周孔의 聖賢의 道, 淸高古雅한 문자향 서권기의 학예로 개화. 개벽으로의 改進를 선두, 즉 조선의 末流를 인식한 신학문을 섭렵하는 인재들을 앞세워 人道. 道心의 義와 理의 추구, 회복을 전제로 하는 회귀의 길을 모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추사가 후지츠카 치카시의 논문 심사평에서 “청조학술의 정수에 정통한 경학의 대가임을 논정한다”로 평가되어짐, 그들 일본인 학자들은 추사를 단지 학문적인 ‘경학의 대가’로 평가하였을 것이나, 필자의 소견은 ‘청조학술의 정수에 정통한 경학의 대가’ 深意, 含意에는 추사의 救國的인 철학적 정수가 내포되어있다고 사료된다. 신헌, 강위, 오경석 등 추사의 개화파의 제자들과 그 후손들이 훗날 조선의 개항과 개벽에 일신을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강점기 암굴의 조선의 역사에 한 줄기의 서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인으로 동화되지 않도록 광복으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추사의 개화. 개벽의 혜안으로부터의 始發인 것이다.

예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쳐 주며 보는 일이란 한 사람의 성격. 말. 행동을 통하여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일, 다시 말하면 예술은 실로 사물과 인간의 모습으로 인도하는 길잡이이다.(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03, p.21) 한 걸음 더 들어가 학문과 예술의 道는 인간으로 하여금 바르게 살 수 있는 길, 慧眼으로 삶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 즉 학문과 예술은 인간의 삶을 혜안으로 들여다 보아 그가 살고 있는 실재에서 실존하는 모두가 비현실적인 허망이 아닌 실사구시의 노력, 투쟁으로 진정한 현실적인 행복을 쟁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과 학문은 현실과 괴리되어서는 아니 되는 實事이며 그 길 위에서의 實事求是는 진선미의 논리성, 그리고 행위는 진선미의 논리성를 바탕으로 하는 용기와 정의가 겸비되어져야 한다. 추사는 서세동점의 파고로 균열되어지는 조선인 위기의 봉착한 삶을 바라보았고 당대의 지도계층의 伏地不動으로 인한 조선의 폐망을 예견한 당대의 지성인으로 현실적으로 대응하였다. 그 대응은 추사 홀로의 투쟁이 아니라 학인과 예인들의 인식 전환, 가르침을 전제로 한 유기적 소통의 관계 속에서의 대책으로, 개화와 개벽의 문을 열었다고 필자는 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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拙文: [秋史 김정희 삶에 침윤된 평생 배움 사상과 현대교육과의 접목 연구], <실사구시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