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石學⦁考證學에서의 실사구시적인 탐구성>- 4

clara jeon 2019. 6. 14. 17:26

진지왕은 진흥왕의 아들입니다. 진지왕 때에는 居柒夫를 上大等으로 삼았었는데, 초방원 비문의 수가한 沙門道人 法藏. 慧忍 두 사람 아래에 ‘00等居0’ 등의 글자가 있으니 저의 소견으로는 본디 좀벌레로부터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이지러진 글자는 마침내 그것이 없어졌으나 다른 本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大 자의 왼쪽 삐침획이라는 것을 이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이지러진 글자의 上半은 이것이 원래 이지러진 것으로서 그것이 漆자의 윗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거칠부가 상대등이 된 때가 진지왕 원년인데 진지왕은 王位 4년간 누리었고, 진평왕이 이어 즉위한 원년 8월에는 伊湌 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니, 거칠부가 상대등으로 있었던 기간은 곧 진지왕의 재위 4년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초방원의 비 또한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 아니고 바로 진지왕 때에 세운 것으로 진지왕도 일찍이 북쪽으로 巡狩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을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고, 역사에 기재된 地理는 比列忽에 불과하지만, 초방원의 비를 통해 비렬홀 이북의 2백 리 지역이 또 신라의 영토로 꺾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으나, 이 거칠부가 隨駕한 것으로 말하자면 진지왕이 또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두 비의 문자가 서로 같은 곳이 많은 것으로 보면 두 비를 동시에 세운 것이 확실하고, 그 시기 또한 모두 진지왕 때에 있었던 듯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완당전집] 제2권, 書牘, <與趙雲石寅永>, p193-195)

추사는 마모된 68자들을 [삼국유사] 등의 古書를 철저히 열람하여 道詵國師의 비, 혹은 무학대사비가 진흥왕순수비일뿐만 아니라, 북한산 古碑가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 재위 기간 4년 동안 설립되었음을 고증하고, 그리고 황초령 고비 역시 ‘南川’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문헌자료 조사하여 이 비 설립의 연대를 정확히 측정, 이들을 훗날 추사의 대표적인 역사고증금석학의 장문의 논문 총 7000여자에 달하는 <禮堂金石過眼錄>를 발표하였다(유홍준, [완당평전]1, p129). 그 경위가 단지 고서를 참고로 한 고증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답사한 후 漸增. 精細. 緻密한 故實的이며 실사구시적인지라 교통이 편리하고, 앉은 자리에서 인터넷 등을 통하여 정보를 쉽사리 입수할 수 현대의 논자들에게는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특히 추사의 현장답사의 행보 중에 1817년 4월 29일, 경주 심심산골에 있는 暗谷洞, 워낙 캄캄하고 험준한 계곡이라는 암곡 속 䥐蔣寺의 <䥐蔣寺 阿彌陀佛 造成記碑> 두 편 발견은 금석학상. 서예연구상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고증으로, 추사는 이를 탁본하여 옹방강에 보냈으니, 담계는 탁본을 보고 이 비문 글씨는 王羲之의 난정서와 懷人이 집자한 왕희지 聖敎序의 글씨를 본받은 동방의 훌륭한 비문으로, 동방문헌에서 중국이라고 칭하는 것에 이 비만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였다(유홍준,[완당평전]1, p.130-135). 추사는 발로 뛰는 실사구시적인 열심, 추사가 예서 대련에 쓴 “옛것을 좋아하여 시간날 때마다 깨진 비석을 찾으러 다니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을 보내어 시를 읊지 못했네” 열정은 탁상공론의 이론적인 공부와는 차원이 다른, 현장에서의 직접적인 體得으로 자신의 학문을 고유화, 토착화 작업으로 개진하게 하였다. 금석학의 산숭해심 <禮堂金石過眼錄>은 추사의 명논문으로, 이는 訓詁的인 고서의 이론적인 고증, 글자의 판독, 문장의 해석, 서체의 탐구, 비석의 형태에 대한 연구와 현장 체험에서 耕作되어진 결실, 결정인 것이다. [삼국사기] [문헌비고] 등 수 많은 각종 문헌자료와 대조 검토한 이 글은 당대에는 역사고증학 논문으로, 현대에서는 정확한 역사고증학으로서의 자리매김 뿐만 아니라, 미술사학으로서 논지의 완벽한 치밀성으로 모범적인 논문으로 인정받고 있다(유홍준, [완당평전]1,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