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石學⦁考證學에서의 실사구시적인 탐구성>- 1

clara jeon 2019. 6. 14. 16:52


박학청논 金石學⦁考證學에서의 실사구시적인 탐구성20190501수.hwp


2)金石學⦁考證學에서의 실사구시적인 탐구성
 
     명조의 멸망은 明儒들에게는 天崩地解로, 송명대 학문의 국시였던 성리학은 공리공담적인 空疎無用함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학문, “왕학망국론”으로 看做되었다. 따라서 명말청초의 학자들은 성리학에 反한 實學으로 공유할 수 있는 학문, 즉 고염무 등을 開山祖로 하는 고증학을 주류로 改進하게 된다. 청대 초중기의 고증학 시대를 일반적으로 건륭.가경대라 지칭, 그 학풍을 “乾嘉學派”라 부를 정도로 고증학은 청대학풍의 시기구분에서뿐만 아니라 당대. 후기 학예문화에 미친 영향력의 有意味性이 至大하다 (각주: 청조의 고증학에 대하여 필자는 앞의 글,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에서 세밀하게 논술, 이 부분에서는 생략한다).
      추사의 삶의 여정을 함께 걷다보면,제주,북청 窮僻한 孤立無援의 유배지에서의 乏盡한 삶을 참삶살이로 隆起한 철학적 교육사상은 황종희,고염무,왕부지 三遺老로부터 옹방강, 완원으로 이어지는 고증학적인 실사구시의 사상적 來歷과 무관하지 않다(필자는 앞의 글,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 고증학은 ‘實事求是’와 ‘無徵不信’을 基調로 삼은 학문이기에, 經學, 文字學, 史學, 書道 등의 학문처럼 고증을 근거로 삼는 데에 있어서 금석문의 역사적인 유래는 청조고증학에서 원천적인 골수라 할 수 있다(정병삼 외, [추사와 그의 시대], 이민식, <추사서파의 금석문>, p 331-332, 필자 정리). 앞의 글 추사의 <연경 방문>에서 서술하였듯이, 추사는 짧은 연경 체류 기간 동안에 옹방강의 서묵서루에서 금석의 진적을 拜觀하고, 귀국 후에도 사숙 담계로부터 학문연찬에서의 금석학을 근거로 하는 고증의 중요성을 書牘으로 지도를 받았다. 특히 추사체의 典範인 서체의 연구에서 금석학의 역사적인 고증의 필요성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비록 추사가 연경에 체류한 기간은 두 달 남짓 불과하지만 옹방강과 완원과의 학연은 그 深意가 至高至純, 즉 과거의 사실을 객관성. 독창성. 전문성의 연구방법을 통해 현재를 실용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고증학적인 교훈으로 추사의 학예 道程에서 담계와 운대는 추사의 평생의 배움 길을 동행한 스승으로, 추사로 하여금 학문의 선택, 방향성뿐만 아니라 學人과 藝人으로서의 眞善美知德體를 다스리는 格物致知 삶의 가르침을 주었다(필자의 앞의 글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요약 ).  
     귀국 후 추사 학문의 행로는 조선의 학예계에 법고를 기반으로 한 실사구시적 고증학 연구에 긴요함을 切感, 연찬에 천착, 조선의 금석을 고증한 [眞興二碑攷]와 [海東碑攷]을 著書, 명조의 멸망 이후에도 그 당시로는 신학문인 고증학을 수용하지 못하고 송의 末流 성리학의 空疎한 공리공담에 陷沒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학예를 진취적으로, 조선풍의 법고창신으로 革新하였다. 이를 후지츠카 치카시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추사를 청나라 경학의 대가인 옹방강. 완원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꿰뚫어, 조선 500년 학문이란 것이 宋明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당대의 논자들의 평을, 마치 외눈박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이 부실한 것임을 여실히 깨닫게 한, 수많은 서적과 탁본이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전해지고 또 서쪽으로 건너가게 하여, 조선 학계를 顯彰하게 한 역사상 미증유의 대학자로 인정한다고 논지하였다([추사 김정희 연구] ,후지츠카 치카시, P.16-17. 필자의 앞의 글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요약 재인용). 이 학예적인 파장을 후학들은 “완당바람” 이라 하며, 필자는 이 파장의 핵심적인 주축은 “추사체”라 決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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