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 4

clara jeon 2018. 12. 17. 16:59

       청초 고증학의 開祖인 고염무를 선두로 한 이들 삼유로의 실존적인 재야적인 활약상 외에, 顔李學派 등이 利用.厚生의 공리적인 실용성의 주창으로, 재야학문이었던 고증학은 건륭제 막하에서는 국가적 시책으로서 그 유용성을 인정 받는다. 즉 건륭기의 청조의 관료들은 문화적인 낙후로 塞外 이민족이라는 폄하를, 방대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고전서 편찬, 고증학 등의 연구를 후원함으로써, 武力으로서의 야만족 정복 왕조라는 汚名을 희석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건륭기의 盛世가 반청복명의 정통의 한족 사대부들을 문화적으로 탄압해 이루어낸 ‘大一統’의 治積이 아니라, 청조와 한족의 사대부간의 화합에 의한 名實相符 仁政이라 평가 받을 수 있는, 王朝 대외 홍보용 施策인 利用的 이념화로, 건륭기의 고증학은 독립된 학문이나 官學的인 측면으로 발전하게 된다. 敷衍하자면 청조의 極盛期인 건륭제의 정략적인 후원으로 이미 시대를 주도하게 된 청조 중기의 고증학은 사고전서 官纂이 고증학자들의 주도에 의해 개설되는 등, 이 시기의 고증학의 행보는 건륭제의 문화.국가의 ‘大一統’, 덕치 이념의 추구와 그 실현의 상징성 내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건륭제의 盛世에 同化된 反官 在野 신사. 지식층의 관료사회에 적응,호응의 능동적인 역할, 親王朝的인 요인으로 고증학은 전문적으로 분야별로 발전, 특히 대진  환파가 중심이 되어 ‘實事求是’, ‘名物度數’를 학문의 궁극적 기치로 내세우고, 古經의 義理를 추구하고 道의 깨달음으로 이를 위한 학문적 방법으로 文字小學을 제시, 이러한 고증학의 복고주의는 전통을 이어 고염무. 대진. 필원.옹방강.완원 등에 의해 考古.金石學의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어 20세기의 甲骨學. 金文學으로 계승되었다.([講座 中國史 四篇-帝國秩序의 完成],<淸代의 思想>,曺秉漢,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지식산업사,2011,파주, p 270.282)이러한 청대 초중기의 고증학 시대를 일반적으로 건륭.가경대라 지칭, 그 학풍을 “乾嘉學派”라 부를 정도로 고증학은 청대학풍의 시기구분에서뿐만 아니라 당대. 후기 학예문화에 미친 영향력의 有意味性이 至大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사고전서 등의 서적 편찬으로 방대한 서적 물량을 확보한 활기찬 북경 琉璃廠 서적시장에서의 조선 실학자의 서적 구입, 그리고   기윤 옹방강.완원 등과  홍대용.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의 청조의 고증학자와 조선 北學派 간의 天涯知己의 문화 교류, 그 波長은 정조대의 르네상스적인 성세와 무관하지 않아, 한 시대를 主流하는 문화이념의 사상이 발상지에서 그 번영이 차고 넘치면 주변으로 반영,轉移됨을 간과할 수 없다.  
   추사의 삶의 여정을 함께 걷다보면, 제주,북청 窮僻한 孤立無援의 유배지에서의 乏盡한 삶을 참삶살이로 隆起한 철학적 교육사상은 황종희,고염무,왕부지 三遺老로부터 옹방강, 완원으로 이어지는 고증학적인 실사구시의 사상적 來歷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 후기 실학적 학문의 발판을 다진 박제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덕무는 고염무의 [일지록]을 탐독한 후 이서구에게 

   [일지록]을 고심고심 끝에 구했다. 3년이 지나서야 이제 남이 秘藏한 것을 꺼내 읽고 있는데 六藝의 文과 百王의 典과 當世의 일을 빈틈없는 근거로 명쾌하게 분석했다. 오호라! 고염무는 진실로 굉장한 학자로다. 먼저 보내주노니 보배롭게 완상함이 어떨까?([雅亭遺稿]권6,[완당평전]1,p63재인용)

그 시대의 사상을 섭렵한 직도이행의 인간적 道理를 행한 含意의 여정임의 結晶, 潔淨,즉 한 인간의 삶이 그 시대의 사상성을 내포하며, 그로 인한 精進, 즉 個人史의 한계를 초월 국가와 국가의 경계를 허무는 共鳴的인 사상사로 인류의 삶을 진화 도약하게 함은, 추사의 평생배움 사상에서의 ‘含意’를 논지하는 필자의 소견을 넘어 一波萬波 통시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