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3

clara jeon 2018. 8. 27. 19:46

    세후에 한 서신에 대해서는 마치 해가 새로와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꽃이 핀 때를 만난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 기쁨을 알 만 합니다. 그러나 다만 방만하고 초췌한 이 사람은 족히 높으신 眷注를 감당할 수 없을 뿐입니다.......
蘭畵 한 권에 대해서는 망령되이 題記 한 것이 있어 이에 부쳐 올리오니 거두어주시겠습니까? 대체로 이 일은 비록 하나의 하찮은 技藝지만, 그 전심하여 공부하는 것은 聖門의 格物致知의 학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일거수일투족이 어느 것 하나 道 아닌 것이 없으니, 만일 이렇게만 한다면 또 玩物喪志에 대한 경계를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지 못하면 곧 俗師의 魔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가슴속에 5000권의 서책을 담는 일이나 팔목 아래 金剛杵를 휘두르는 일도 모두 여기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큰 복이 있기를 바라면서 갖추지 않습니다.([阮堂全集],卷一, 書牘, 與石坡興宣大院君, 其二 p.167)

    추사는 석파에게 난을 가르치기 위한 蘭譜가 契機가 되었던지, “난초를 안 그린 지 스무 해인데 不作蘭畵二十年 ”畵題로 <不作蘭圖>를, 그야말로 蘭의 형상이 아닌 제주에서의 추사의 모습이었을까. 바람 속을 달려가는 듯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파격적인 神似로 그려, 추사 스스로도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畵題한 불후의 神品을 창출한다. 이 작품은 화제를 쓴 순서도 기존의 正法의 틀을 깨뜨렸을 뿐만 아니라, 간결한 구도 역시 바위도 풀도 아무 배경도 없는 단지 바람 속을 날아가는 듯, 난 한 포기가 전부이다. <부작란도>에서 화제를 걷어내면 이 난 그림은 [歲寒圖]와 같이 허허롭고 스산하다. 그러나 내면의 울림은 [세한도]와 같은 인간의 의지로서 삶의 한계를 초월한 궁극의 예술성의 공명감을 감상자에게, 추사가 염려한 바, “초서와 예서의 奇字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의 단정을, 그가 깨뜨린 正法의 구도 못지않게 아예 초월해 버린다.
    추사는 이와 같이 제주 귀양 삶에서 학예적인 천착에서의 박학독행, 정신적인 수양의 평심정기로 숙련된, 문자의 향내가 나고 서권의 기가 스며있는 시.서.화 창작, 독서를 하며, 지기지우의 벗들과 학예 談論, 遊於藝로 강상시절 2년 반을 정치계와는 무관하게 自適하였다. 강상시절에도 변함없이 추사를 찾아 온 제자들, 소산 오규일, 우봉 조희룡 등은 사제지간의 도리를 행하였다. 그리고 특히 평생지기인 당시 영의정인 권돈인과는 함께 그림을 그려 둘의 그림을 함께 표구한 <合壁山水軸> 명작을 제작한 것으로 보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오랫만에 만난 노호 강상시절에 이들 知己之友는 모처럼 書畵를 한가로이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추사의 서예작품에는 “옥적산방에서 쓰다”라는 관기가 들어있는 蘭亭帖에 대한 논고인 <禊帖攷>, 그리고 도봉산 속에 살고 있는 彝齋 권돈인에게 강호에 살고 있는 추사를 그리라는 속내인지, 아니면 화제에 의미인 “산에 살고 있지만 또한 강호의 뜻을 갖추고 있으니 표구해서 옥적산방에 거십시요”인지, 산에는 없고 강에만 있는 藻와 艓를 글자 하나 하나에 회화적인 구성미와 상징성이 농후한 <藻華艓> 등 권돈인의 別墅인 옥적산방에서 쓴 작품이 많다.([완당평전]2, p552-556)
    그러나 노호의 강상시절, 추사는 제주 귀양살이에서 연마한 학문과 예술의 기량을 벗들과 교류, 自適하면서 가작을 창작하는 ‘遊於藝’의 삶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추사의 강변집에 찾아드는 지기지우 벗들과 제자들 중에는 벼슬하는 이가 당연히 있었고, 그로 인하여 안동김문에 監察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눈엣가시인 政敵인 추사와 영의정인 권돈인, 그리고 안동김문의 監視 대상 石坡 李昰應과의 교류를, 당시 외척세도로 정국을 완전히 장악한 안동김문이 坐視할리 萬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