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7)

clara jeon 2018. 7. 31. 17:34

   위와 같이 개혁과 개인의 悲願, 位相的 왕권 立地에 집착한 갈등으로 인한 病苦로 정조가 서거한 후, 안동김문의 농단과 독란의 전횡으로 조선의 전통적 世道朋黨에 의한 사림정치질서와 탕평의 정치적 지향은 悖惡의 專橫정권 勢道정치의 전개와 함께 무너지고, 신분제 등 명분론적 사회질서와 그를 뒷받침하던 주자학적 이념도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하였으며, 중앙으로부터 소외되었던 향촌사회에서도 民生의 사회 변혁 요구가 민란의 형태로 거세게 분출하였다.([추사와 그의 시대] 정병삼 외, 돌베개(파주), 2007, p18)
    순조는 이처럼 정치기강이 문란해져 과거제도와 관료 등의 부정,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이 도탄 빠진 혼란기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1800년 즉위 하였다.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에 독살설이 유포되는 가운데 아무런 준비 없이 등극된 어린 왕의 미약한 왕권을 보필하기 위하여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는 영조대의 노론벽파를 옹호한 인물로, 수렴청정의 주역인 정순왕후는 그녀의 오빠 김귀주를 호조판서로 사촌오빠 김관주를 우의정으로 요직에 임의로 등용하는 등, 경주 김문과 그들에 합세하는 심환지 등이 정국을 운영하게 하여 벽파들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추사의 11촌 대고모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친정은 時派와 대립한 경주 김문의 노론 벽파로, 이들이 실세로 집권을 하자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時派를 천주교 탄압을 빌미 삼아 辛酉迫害 때 정계에서 대거 축출한다. 순조실록에 실린 정순왕후의 敎旨나 下敎의 내용을 보면 그녀는 정치적인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자신의 친정인 노론파의 집권을 위해, 정조의 임오년의 벽파의리론을 주장하여 신유년의 환국으로 경주 김문과 오래도록 대립하였던 남인과 풍산 홍씨들을 축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을 賜死, 일문의 집권 장악, 지배에 障碍가 될 수 있는 단초를 완전히 제거하면서 정권장악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순조 초반 정순왕후의 垂廉聽政과 정국변화, 임혜련, 朝鮮時代史學報, Vol.15 ,2000],p40)그리고 장기 집권을 위해 친족인 김관주를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등 주요 관직에 경주김문과 그들과 정치노선이 같은 벽파 인사들을 등용하여, 인사의 근본인 互對라는 탕평은 물론 청론사류 사림 정치의 이념도 와해되는 가운데 정국은 노론 벽파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하였다. 더욱이 청정 후반, 정순왕후와 척족인 노론벽파는 정조 년 간 탕평으로 그 의미가 퇴색한 대행왕의 僻派義理를 정립하여 일당 전제를 지향하려는 무리수를 두었다. 이로 인하여 신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관주가 우의정으로 정승에 반열에 올라있고, 김일주가 경연관으로 순조를 보필하고 있는 등, 벽파 세력이 국정을 장악하였다는 일부 척족 벽파 나름의 판단으로 정순왕후가 건강상의 이유로 섣부른 撤簾하자, 인재등용, 진로 등 정계에 넓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척족들과 소수의 잔재 벽파들로 권세를 유지하던 경주 김문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 정순왕후 사망 후, 결국은 丙寅年 환국으로 경주김문계의 노론 벽파는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이 시기에 재집권의 기회를 위해서 노련한 隱忍自重 잠수를 하고 있던 김조순을 비롯한 時派, 이미 집권기 동안 곳곳에 권력을 결집하고 있던 안동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재개되었다.(純祖 初盤 貞純王后의 垂簾聽政과 政局 變化 p7. 47)
    안동김문, 즉 시파를 이끌던 주역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다. 김조순은 척화파 안동김문 김상헌의 후손이자 정조의 탕평책을 적극 지지한 時派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서 60여 년 안동김문 세도기의 서막을 열고, 장기 집권이 유지할 수 있도록 발판을 구축한 周到綿密한 정략가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 정순왕후의 친족인 경주김문을 비롯한 벽파가 정권을 집권하였을 시에는 隱忍自重하였던 김조순은 철렴 후에는 國舅로서 적극적으로 왕을 보필하였다. 장동 안동김문의 수장으로서 인사권을 통해 중앙관료와 지방수령으로 이어지는 국가 시스템을 장악, 안동김문이 주요 관직에 올라 권력을 쥐고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더욱이 빈틈없이 치밀한 점진적인 전략으로 타 유력성관을 몰아내고 30년 동안 당상으로서 비변사를 總括하였으며, 급기야 1808년, 순조 8년에는 군권마저도 장악하면서 세도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한국사 인물 열전,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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