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6)

clara jeon 2018. 7. 31. 17:33

  

   그러면 이 시기, 안동 김문이 세도를 구축한 영조 말, 정조 초기에 벽파로서의 경주 김문의 정계 부침은 어떠하였는가, 경주김문은 왕가의 近戚 월성위가로 국왕들의 총신 權門勢家로 대대로 고위관료직을 역임하였음을 앞의 글에서 전술하였다. 그러나 경주 김문 門閥의 世道는 국왕의 시책에 무조건 順從, 盲從, 복종하지만은 않아 坦坦大路는 아니었다. 영.정조의 탕평책은 초중기에는 고른 인사의 등용으로 근척이 정계에서 정권을 勢道하는 것을 방지, 특히 정조는 재위 초기부터 영조대의 왕과 신료의 의견을 절충 한 緩和論이 아닌 의리에 바탕을 둔 강경 탕평책으로 외척, 척신, 총신을 축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洪鳳漢을 청명류라는 정치적 결사대와 엮어 일단 정치판에서 제거한 김귀주를 다시 재론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문안하지 않았다는 표면상의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 1779년(정조 3)에 圍籬安置하였다. 그러나 실은 노론 벽파의 중심 인물인 김귀주를 정계에서 축출하고자 한 정략이었다. 영조대에는 정순왕후의 외척인 경주 김문은 영조의 장인, 정순왕후의 아버지 金漢耉가 1763년에는 어영대장으로 제수 되었으나, 영조 말 1764년, 영조 40년 척신으로서 당론에 관여했다 하여 아들 金龜柱와 함께 파직되었다. 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 초반에 탕평책을 반대하는 浩然之氣 상소로 파직된 기사로 보아 경주 김문은 왕가의 내척이라는 국왕의 특별한 비호나 時流 副應과는 無關하게 왕의 내침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家訓인 “直道以行”의 節義心志로 世道, 노론 벽파의 종풍을 대내림하였다고 필자는 사료한다. 이러한 연유로 경주김문은 왕가의 근척임에도 안동김문과 같은 전횡, 농단, 독란의 勢道擴張은 白眼視, 정계에서의 주도권은 未備하였고, 지지기반이 脆弱하여 한 시기 집권을 하였어도 순조대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와 같이 그 기간이 단편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의 경주김문 출사의 기사를 보면 영.정.순조대에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영조대에 대사간.우참판.이조 판서. 우의정. 영의정,증조부 김한신의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 제조 등의 요직, 조부 金頤柱가 영조대에 持平 승지. 광주부윤. 정조대 초반, 대사간. 형조판서, 정.순조대 추사의 양부 김노영 사은사, 친부 김노영부 김노경과 의 6조 판서. 양관의 제학. 양도의 감사. 판의금부사 등 그리고 앞의 <출사>의 언급에서 추사의 대사성까지의 임직 등 고위관직을 網羅한다. 그러나 안동김문이 시파의 가문으로서 영조 후반기 부터는 점진적으로 출사가 빈번해짐과는 대조적으로 벽파로서 경주 김문의 권문세도는 점차 微微해져 감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주 김문만의 쇠락이 아니라 장동 안동김문의 일당 독주로 이들 안동김문을 제외한 다른 有力姓冠들은 도태되어져, 견제 세력이 없는 안동김문은 정조의 서거 이후 안동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정계의 요직을 瀆職하면서 외척세도가 전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다시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추사의 졸기 중, 안외순이 언급한 “그의 정치적 삶은 매우 불행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희생 당한 삶이었는데 역사(실록)을 통해서라도 그 부당한 대우를 ‘복권’ 시켜야 한다는 메시지이다”(안외순, <秋史 金正喜 家의 家禍와 윤상도 獄事>, 추사연구 4, p266) 추사의 불행한 정치인 삶, 부당하게 희생 당한 삶의 원인을 필자와 강주진(僻派家門 出生의 秋史 金正喜 : 濟州 流配動機를 중심으로, 姜周鎭, 탐라문화, Vol.6, 1987, 전문 참고)의 논구한 바와 같이 추사가의 정치색이 대대로 노론 벽파임에서 도출한다면, 이른바 정조대의 노론 벽파 대 시파와 남인의 붕당의 대립에서, 기존의 상식의 선입견과 편견, 즉 노론이란, 수구세력이란 시대의 흐름을 정지, 역행하면 자신들의 권력 유지만을 眈益하는 부패세력인가를 통찰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들의 기록이다. 다시 뒤집어 말하자면 패자는 승자들의 견고하게 다듬는 승리 외침에 침묵할 수 밖에, 그 당대에는 도리가 없다. 그러나 항상 누군가가 반드시 그 견고한 포장을 들추어내어 오류된 탁류의 시간들을 바로 잡았기에 현재의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정의의 축으로 지탱하며 바른 삶으로 실존한다. 추사가의 노론 벽파, 안동김문의 시파, 이 정쟁에서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이 진정한 승자의 정치적인 노선, 다시 말해 정조에게 빌붙지 못해 밀려난 노론 벽파를 단지, 적어도 안동김문이 자신의 권문세가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을 제외한 유력성관을 제거한, 低俗,低劣한 派閥의 헤게모니 쟁탈전, 그 범위 내서의 패자로 한계지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조가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여 그 治積에 賞讚은 하나, 드라마 속의 勸善懲惡 등 二分論의 지엽적인 시각을 벗어나 통시적인 안목으로 본다면 정조의 왕조 개혁의지는 조선을 19세기로 도약, 전환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숙종 이전의 派閥的인 독당의 專制로 퇴행시켰다. 집권 말기에 들어서서 정조는 화성의 대역사에서 보듯이 자신의 후계의 생존을 김조순에게 위탁하여 왕조의 치국을 개인의 悲願으로 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국 조선의 500년 왕조사를 망국으로 마무리하는 빌미를 안동김문에게 基調한 것이다. 1741년 영조 17년 金鎭商은 이미 탕평책이 公平無私하지 만은 않을 것임을 예견, “전해지는 폐단이 흑백(黑白)이 뒤섞여 있어도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마침내 어지러이 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3월 27일 임진 3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라 極諫하였다. 정조가 王權과 王命의 존립을 ‘흑백(黑白)이 뒤섞여 있어도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는’ 안동김문과 時派, 派閥的인 親王派로의 傾倒, 더욱이 장인 김조순에게 의지한 결과는 안동김문 외척세도기 60년을, 그리고 결국 조선왕조 500년사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悲運으로 망국하게 되었다. 정조가 衡平性 寬容의 공평한 치국으로 정조의 私議에 反하는 신료들의 言路를 차단하지 않고, 시파로의 경도된 지배의 획일화로 벽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世道之任, 朋黨世道, 즉 시파와 벽파를 서로 견제하는 양립하게 하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500여 년 보다는 長長하지 않았을까? 그러하다면 작금의 우리는 당대의 노론 벽파와 추사와 추사가의 기록되어지지 못한 패자의 진면목의 黨色, 家風, 宗風을 당연히 재조명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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