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5)

clara jeon 2018. 7. 31. 17:31

   영.정조의 탕평책은 결국 당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시 정국을 붕당으로 분열하게 하는 조선왕조 정치사에 끝내 수용되지 못한 실패작이었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붕당 타파를 주도하였지만, 그보다는 조선 후기에 당쟁 일색인 정국의 파행을 탕평정책으로, 붕당을 타파하는 인사정책으로, 정쟁을 보합하는 개혁으로서, 위태한 국가의 질서를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은 하였다. 그들이 그 지난한 과정에서 실현한 타협과 절충의 시도와 극복, 혁신정치의 추진력의 면모는 조선왕조 500년 정치사에 잠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으나, 결국 조선왕조 정치사에 끝내 수용되지 못한 실패작 탕평책은 영조 초기 반탕평파의 반론, 이미 1732년, 영조 8년, 추사의 고조부인 이조 판서 金興慶(1677-1750)의 상소 "성명(聖明)께서 근본 법칙을 세워 바야흐로 탕평(蕩平)하는 정치를 힘쓰시는데, 다만 정주(政注)하는 즈음에 오로지 뒤섞는 것만 일삼아 청탁[涇渭]이 구분되지 않고 행동 거지가 적당함을 어겨 당당한 청조(淸朝)가 문득 골동품 장소가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무릅쓰고 나온다면 반드시 장차 자칫 거스름을 당할 터이니, 이것이 나아갈 수 없는 큰 단서입니다."([조선왕조실록](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 1월 17일 을해 2번째기사 1732년 청 옹정(雍正) 10년), 그리고 1741년 영조 17년 金鎭商의상소, “전해지는 폐단이 흑백(黑白)이 뒤섞여 있어도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마침내 어지러이 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3월 27일 임진 3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의 내용은 후학들에게 영.정조의 親王的 탕평책이란 것을 反芻하게 한다.
    정조가 闡明한 右賢左戚이 파벌적인 失政으로 오히려 國舅 김조순을 수장으로 한 안동김문의 외척세도 발호기에 등극한 순조대의 정황을 논술하기 전에, 이 부분에서 언급해야 할 문제는, 추사의 고조부 金興慶을 筆頭로 한 노론 벽파인 경주김문과 시파인 김조순을 座長인 안동김문, 이들 두 가문의 상반되는 정치색으로서의 대립각의 정계 진출 행적이다. 추사의 평생 학예 삶 전반에의 波長, 家禍를 지엽적인 헤게모니 Hegemonie 死鬪가 아닌 대대로 이어온 정치관에서의 통시적인 宿敵임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두 가문의 정계에서의 행적 追跡은 有意味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는 이미 영조대에 경주 김문은 정통적인 노론의 벽파의 탕평을 반대하는 당색이었고, 안동 김문은 노론이지만 시파적인 탕평을 지지하는 당색을 가미하고 있었다는 추정 하에 논지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후술에서 그에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여 논증하기로 하였다.
    정조의 壬午義理論은 경주김문과 안동김문의 시. 벽파의 대립의 발단이 되었으며, 더욱이 화성 대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의 貴近之弊는 노론 벽파에게 심한 지탄을 받게 되어 시. 벽파의 대립은 본격화 되었다. 그러하다면 정조의 척신파는 시파임이 확실하다고 단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여기서의 시파는 정조의 과도한 지지와 지원 보호로 육성한 喬木世家 안동김문이며, 이들과의 대립각은 정조의 등극을 저해하고, 정조에게 축출되었던 벽파의 유력성관, 정순왕후의 친족 김귀주를 수장으로 한 경주 김문 벽파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안동 김문의 출사가 시작된 영조 후반 이었는데, 그 시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듯이 *영조는 탕평에 호의적인 척신과 총신들만을 이끌고 거의 혼자 정국을 이끌고 있었던 시기이다. (*각주: 영조 43년 11월 권 109.- 전하께서 총명을 믿고 혼자 이끌고.....) 그리고 영조 말기에 출사한 안동 김문은 정조대로 그대로 이어져, 특히 19세기 초반, 세도의 주축 역할을 하였던 안동 김문 인사들이 이 시기에 출사하였다는 것은 주목을 요하는 것이며,(이경구,17~18세기 壯洞 金門 연구, 서울大學校 국내박사,2003,p.40) 더 나아가 추정하건데 정조 초반, ‘時 ’를 정당의 이념으로 부각한 정조의 과도한 편파의 지지와 지원으로 급속히 승진되는 김조순의 출사의 예로 보아도, 이미 영조 후반에 장동의 안동김문, 일명 장동 김문은 시파의 당색으로 정계 주도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논지로 推移한다면 영조 후반기, 노론의 신임의리가 절대화 되었던 시기(김용흠,조선의 정치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p.562/14)에 영조 주변에 남아 정무를 처리하였던 관료들 중 장동김문 신료들의 당색은 시파로 경도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유력성관인 이 두 가문의 시. 벽파 대립이 영조 후반기부터 발호되었다고 단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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