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출세(18)

clara jeon 2018. 7. 6. 23:32

   成均館은 조선시대에는 국가 이념을 실현하는 인재양성을 위한 首善之地로 국가에서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으로 국가의 적극적인 장학정책에 의하여 발달하였다. 즉 성균관의 교육이념은 주자학을 연구, 보급하여 조선 건국의 통치이념인 治國爲民 致君澤民 治國平天下를 목적으로 체제 유지에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여 儒敎를 사상적 배경으로 하는 理想社會 실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明人倫, 成人才의 실현을 위해 유학의 三綱五倫, 효, 제, 우, 자, 충, 신으로 [大學]의 至於至善을 修身하여 齊家治國平天下의 성균관 교육제도는 조선왕조 후기까지 왕권체제 유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과거제도는 도덕사회 구현의 기초가 되는 유학의 小學, 四書五經으로 治國爲民 소양을 硏磨한 사회 지배층인 士族의 자제들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占有된 관료 등용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한 성균관 출신 관료들은 風化之源 賢士之關 역할로서 조선왕조 500년을 유교의 사상적 이념으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이끌고 간 원동력이어서, 당연히 성균관의 학제는 과거제와 연계하는 방향으로 정비, 발전되었다([조선시대 성균관, 사학의 유생에 관한 연구], p14).
    성균관의 기원은 중국 周代에 천자의 도읍에 설립한 辟雍과 諸侯의 도읍에 설립한 泮宮의 제도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의 國子監, 신라시대의 國學, 그리고 멀리는 고구려의 太學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성균관의 직제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고려시대 직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大司成, 祭酒, 樂正, 直講, 典簿, 博士, 諄諭博士, 進德博士, 學正, 學錄, 直學, 學諭을 두고, 書吏을 배속시켰다(한민백과사전). 成均이란 “成人材之未就”, “均風俗之不齊”의 첫 글자를 취하여 “인재를 이룬다, 풍속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明人倫, 인륜을 밝히는 成人才, 인재를 기르는 성균관 관료들은 제수함에 있어 타 기관의 관료들보다 그 자격을 엄격하게 선별하여 임용하였다. 특히 유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관들은 그들 履歷이 유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함으로 적임자를 師表들의 명부인 師儒錄에 의해 薦擧하였다. 理想的인 교관상은 학문에 精通한 學文之士, 깊이 있는 학문과 인품이 德性스러운 德性之士, 그리고 품행이 숙성하고 흠 없이 의젓한 老成之士로서 수령이나 중앙의 주요직에 있는 관리 중에 교관으로서의 적임자가 있으면 성균관 보직으로 移職시켰으며, 관리의 신규 제수에 있어서도 성균관 보직을 우선으로 그 적임자로서의 여부를 먼저 고려하였다.
    성균관은 국가에서 설립한 고등교육기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추사가 임직한 大司成은 현재의 보직으로 말한다면 우리나라의 수재들인 모인 최고의 실력을 갖춘 국립대학의 총장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균관의 총재직으로서 대사성의 학문과 덕성, 연륜은 당대의 선비로서는 首善之士로 學藝 硏磨의 기품을 갖추어야 함은 당연하였다. 특히 추사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제수된 시기는 추사의 가문인 경주 김문과의 세력 다툼에서 정권을 재장악한 안동김문 세도 재주도기, 효명세자 대리청정기(1827-1830) 反안동김문세력형성에 의해 剝奪되었던 세력을 다시 구축한 시기로 타 유력성관은 强迫, 안동김문과 이들과 癒着 人事專橫의 壟斷의 시기였다. 추사가 이 시기에, 公卿大夫 문과출신의 자제들이 所望하는 최고위 관료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薦擧되었음에는, 추사의 학예와 인품의 學文之士, 德性之士, 老成之士 의 具備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성균관 유생의 입학자격은 1. 과거에 의한 성균관의 핵심 유생인 생, 진사가 되는 생원시, 진사시에 입격한 자 그리고 향시, 한성시에 합격한 자. 2. 학교교육에 의한 하급교육기관인 四學에 재학 중 四書五經 중 一經을 통과한 15세 이상인 자인 四學升補生 3. 신분에 의한, 父祖 와 조상의 지위와 업적을 배경으로 입학한 門蔭升補生이다. 생원, 진사시는 매 3년 마다 시행되어 생원 100명, 진사 200명을 선발하였고 특별히 국가의 경사가 있을시 시행되는 증광별시에서는 23명의 생원진사 뽑았다. 조선왕조 500년간 생원시는 229회, 진사시는 112회를 실시하여 생원 24,096명, 진사 23,652명을 배출하여 조선왕조의 관리 등용문의 면목을 후기까지 유지하였다([조선시대 성균관 교육제도 대한 연구],p50). 때로는 왕세자와 대군이 입학하여 宮侍를 대동한 왕세자가 성균관 내에 元子學宮에서 기거하며 유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로 보아 성균관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王家와 權門勢家들이 인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성균관 유생들은 국비 장학생으로 紙筆墨은 물론, 일상의 의식주를 국비로 지원 받는 혜택과, 과거에 있어서도 관시·謁聖試·春秋都會 등 특전이 부여되었고, 그 밖에 薦擧의 특혜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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