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 의미화 <인재설>-서론(2 )

clara jeon 2019. 6. 23. 17:31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애당초 南北이나 貴賤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아이 적에는 흔히 총명한데, 겨우 이름을 기록할 줄 알 만하면 아비와 스승이 傳注와 帖括로 그를 미혹시키어,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보지 못하고, 한번 혼탁한 먼지를 먹으므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리고 다행히 諸生이 되었더라도 머리가 둔하여 민첩하고 통달하지 못하므로써 아무런 보람도 없이 어렵스럽게 試場을 출몰하다가 오랜 뒤에는 氣色조차 쇠락해져 버리니, 어느 겨를에 제한된 테두리 밖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둘째이다.
사람이 비록 재주는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生長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하여 山川. 人物과 居室. 遊御 등에서 크고 드러나고 높고 웅장함과 그윽하고 특이하고 괴상하고 호협한 일들을 직접 목격해보지 못하므로써,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耳目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手足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그 셋째이다.
이상의 세 가지가 사람으로 하여금 才力이 꺾여 다해서 비통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이 왕왕 이와 같다. 그러므로 나이 많은 고루한 儒生도 文이 꼭 없을 수는 없으나, 귀로는 많은 것을 듣지 못했고 눈으로는 많은 것을 보지 못했음으로 인하여 촌스럽고 고루한 지식만을 내놓게 되니, 천하의 광대한 文에 비유한다면 어찌 다시 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의 妙는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그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靈氣가 황홀하게 찾아오고 생각하지 않아도 이르러와서 그 괴괴하고 기기함을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완당전집]卷一, <人才說>, p.68)

추사는 위의 글에서 “하늘이 인재를 내리는 데 있어서는 애당초 南北이나 貴賤의 차이가 없으나, 누구는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에 대한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그 문제점의 첫째는 가정. 학교교육, 둘째는 과거제도의 폐단, 셋째는 전반적인 교육환경으로 지적, 그로 인하여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촌스럽고 고루한 지식만을 내놓는” 교육의 창의성과 인재의 도태됨을 歎痛하고 있다.
    현시대는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경제, 기술, 예술, 정치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의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어 창의와 인성을 결합시킨 교육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李時雨,[논어]를 통해 본 유학의 창의성>, [儒學硏究], 제44집, 충남대유학연구소 발행 2018, 한글요약문). 이러한 multiplayer의 절대 필요성은 추사가 지적한 당대의 교육의 문제점과 유사 동일한, “혼탁한 먼지”의 교육환경에서 도출되는 동시대적인 난제를 내포하고 있다. 필자는 앞의 글, Ⅲ.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적 의미화-서론에서 大學入試로 인한 “일괄적인 沒個性化 논지의 병폐는 한 결 같다”라고 회의적으로 논지하였다. 이는 <인재설>에서의 추사의 지적, 科擧로 인한 “남의 것을 따라 흉내나 내는” “촌스럽고 고루한 지식만을 내놓는” 즉 추사의 당대나 현대의, 교육의 창의성과 인재의 도태의 동일한 과제이고, 더구나 작금에서의 multiplayer 인재 양성과 需給에 있어서의 감당과 永續性의 뒷받침 여지, 즉 인재의 평생배움의 진로로서의 창의적인 선진성과 미래지향성 문제까지도 multichannel적으로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