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 의미화 <인재설 >-서론(1 )

clara jeon 2019. 6. 23. 17:14


2. 人才說-서론 20190623.hwp



      [조선왕조실록]이나 [완당전집] 序文에 축약하여 기술된 추사의 삶은 形似的으로 보면 대단히 비극적이다. 조선시대의 왕가의 내척, 高官大爵을 무수히 배출한 명가로서 월성위가의 경주 김문처럼 철저하게 파멸되어진 士大夫家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추사는 참담한 가문 파멸의 顚末을 경주 김문의 종손으로서 堪耐하였다. 추사의 서간문을 읽어보면 投棄된 백척간두의 삶의 극한점에서의 고통을 절절히 호소하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家勢의 몰락과 파멸, 특히 첫 유배지인 절해고도인 제주 대정현에서의 고독과 절망, 세한의 恨의 시절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愁心의 서러움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이내 감탄하게 한다. 추사의 불굴의 정신력. 그에게 몰아닥치는 노도의 현실을 도피한 적이 없는, 삶을 좀처럼 거부하지 아니 하는 도전적인 투쟁력에, 한 인간이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으로 일구어내고 있는 학문과 예술성에 感服한다. 추사의 구부러지는 의지를 반듯하게 펼 수 있도록, 直道以行 할 수 있도록 견지하여 준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儒學의 誠의 修己로 篤行한 自己潔淨의 추사의 心魂과 추사의 天賦的 인 자질, 그리고 일분의 완성을 위한 추사의 刻苦 노력을 支持, 共鳴하는 주위 인재들의 지렛대 역할이 있어, 추사가 평생배움의 학예인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고 端言한다.
    추사는 사람다운 사람, 품성이 아름다운 人才를 참으로 아꼈다. 추사는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품성과 능력, 노력이었기 때문에 서출인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심, 추재 조수삼,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등 譯官 출신의 中人, 그리고 우봉 조희룡, 고람 전기, 희원 이한철 등 중인 화가와 도화서 화원들, 더욱이 당시로서는 賤民이었던 스님들과 인간적인 교류 등의 신분적 개방성은 추사의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념이기도 했다(유홍준,[완당평전]1,p.170). 추사는 絶體絶命의 삶의 현장, 안동 김문에 의해 “나라의 正道가 행해지지 않는 死地에서도 志操를 굽히지 않는 꿋꿋함”([中庸]9;國無道至死不變 强哉矯), 조선선비의 浩然之氣 기개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 선각한 스승의 직도이행의 평생배움의 삶을 정립, 止於至善의 모습으로 率先垂範, 제자들을 先導. 善道하였다. 추사는 자신에게 향한 존엄성을 精進, 현실의 비극을 학문과 예술로 승화하게 하여, 그 과정에서 담금질된 지고한 인품을, 삶을 통합하는 역동성으로, 현실에서 發露, 發現하여 제자들을 존엄한 한 인격체로 성장시켜 실사구시로 실존하게 하였다. 더욱이 추사는 배움을 청하는 이들의 성품을 분별하는 데에도 탁월한 慧眼을 가져, 그가 培養, 育成한 인재들은 眞善美한 인격, 사상, 능력으로 ‘완당바람’으로 조선후기의 학예를 風靡, 더 나아가 開闢. 開化의 救國 활약을 한다. 이러한 신분 초월, 인성과 능력 위주의 교육관의 신념을 추사는 <인재설>에 明若觀火 기술, 다음과 같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대 가정.학교교육과 과거제도 폐단으로 인하여 인재들의 인성과 재능이 사위어 감을 비판하고,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당대 교육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破格的인 추사의 <인재설> 전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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