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秋史體에서의 실사구시적인 法古創新>- 6

clara jeon 2019. 6. 15. 16:40

     추사의 서슬퍼런 이 변파에 대하여, 유홍준은 비평은 역사적 비평으로 임해야지 전시대의 서가를 후인이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 즉 圓嶠 李匡師(1705-1777)가 죽고 15년이 지나서 태어난 추사가 동시대적인 신랄한 비평을 한 것은, 추사가 역사를 너무 쉽게 생각했고,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 많다(유홍준,[완당평전]1, p.325)하나, 필자는 생각을 달리 한다. 그러면 원교 이광사 死後에도 썩은 쥐꼬리, 無法固陋를 붙들고 연일 臨摸나 하는, “조선 말기 서화계의 mannerism” 부식된 틀에서 찍어내는 조잡한 글씨체를 누가 질타할 수 있었겠는가. 필자는 썩은 쥐꼬리를 썩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직도이행의 金剛眼 酷吏手인, 先覺한 추사만이 변파할 수 있었다고 主唱한다. 蛇足으로, 만약 [원교필결후]로서 조선말기 서예가의 매너리즘을 추사가 인정사정없이 조목조목 몰아붙여 圓嶠 李匡師 書派를 변파하지 않았다면, 작금 書道의 행로는 어떠하였을까. 추사는 [書圓嶠筆訣後] 말미를 <適千里說> <人才說>의 저술 내용과 맛갑게, 조선 서화계가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됨을 단지 원교의 탓이 아닌 조선이라는 궁벽지의 환경을 주요인으로 주목하며, 그나마 厚德하게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 어찌 원교의 허물이랴. 그 천품이 남달리 超越하여 그 재는 지녔으나 그 學이 없는 것이요, 또 그 허물이 아니다. 고금의 法書와 善本을 얻어보지 못하고, 또 大方家에게 나아가 취정을 못하고 다만 초이한 천품만 가지고서 그 고답적이 傲見만 세우며 재량을 할 줄 모르니 이는 叔季 이래의 사람으로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그의 ‘옛을 배우지 아니하고 情에 인연하여 도를 버리는 자들에게 뜻을 전한 것’은 사뭇 자신을 두고 이른 말인 것도 같다. 만약 선본을 얻어보고 또 有道에게 나아갔던들 그 天品으로써 이에 국한되고 말았겠는가([완당전집] 제6권, 題跋, <書圓嶠筆訣後>, p244).

추사의 변파는 단지 원교의 명성을 蛇蝎視함이나 동국진체 국풍화에 대한 폄하의 발로가 아니다. 오히려 위의 글은 원교처럼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인재가 적천리적인 스승을 만나 고금의 법서와 선본, 즉 精細, 精確한 학습자료를 선별 받을 수 있었다면 “有道”로 절차탁마하여, 그 천품은 [필결]로서만 卒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감히 후학으로서의 안타까움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