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秋史體에서의 실사구시적인 法古創新>- 5

clara jeon 2019. 6. 15. 16:33

심지어 붓은 먼저 가고 손은 뒤로 간다(筆先手後)것은 더욱 뒷사람에게 보여줄 것이 못 된다. 서가가 먼저 할 것은 현완과 懸臂에 있어 마침내는 온 몸의 힘을 다 쓰는 데까지 이르는데 지금 ‘붓은 먼저요 손은 뒤라.’ 하고 또 ‘온 몬의 힘을 다해 보낸다.’ 했으니 붓이 먼저 갔는데 어떻게 손과 몸에 의뢰할 수 있는가. 선후가 모순되어 스스로 그 例를 어지럽히며 조리가 닿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
아, 세상이 다 원교의 筆名에 震耀가 되어서 그의 상. 좌. 하. 우. 伸毫. 筆先. 諸說을 금과 옥조처럼 떠받들며 한번 그 迷惑의 속으로 들어가면 의혹을 타파할 수 없게 되므로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는 바이다([완당전집] 제6권, 題跋, <書圓嶠筆訣後>, p240-242).

”원교는 懸腕하고서 쓴 게 아니다...” 그리하여 그 不實한 “迷惑의 속으로 들어가면 의혹을 타파할 수 없게 되므로......” “원교를 추종하는 자들이 及其也 僭濫한 迷妄에 빠져들어...... 다 알지 못하면서도 원교의 서체를 옥조로 떠받들고 있다”원교의 저서 [筆訣], 서체 그리고 원교의 제자들까지도 싸잡아 망신을 주는 이 변파는 참으로 제삼자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심한 말이다. 추사는 圓嶠 李匡師(1705-1777)가 죽고 15년이 지나서 태어났으니 원교는 이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대대로 名家이며 名筆家로 원교 또한 양명학자로 인품과 학식에 덕망이 있어, 1755년 전라도 나주 불온 벽서사건으로 백부와 연좌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었을 때, 유배지까지 30명이나 되는 제자가 따라 왔을 정도였으며, 원교는 귀양살이 30년 동안 정말로 글을 많이 써 당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귀양지에서도 그의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으로 門前成市를 이루어, 할 수 없이 아들. 딸에게 대필까지 시켰다고 하니(유홍준,[완당평전]1, p.321-322), 이 글을 一讀한 당대 원교의 후학들의 慘澹함을 짐작할 수 있다.
      원교는 조선의 서체를 동국진체로 국풍화하면서 [筆訣]이라는 서예의 역사, 이론서를 저술하였고, 자신의 글씨를 [華東書法]이라는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당대 지대한 영향을 준 조선 중후기 서예가의 高峯이었다. 이러한 자리매김으로 인하여 원교에 대해서는 더구나 후학들에게 교과서라 다름없는 圓嶠 [筆訣]대해서는 감히 그 누구도 “옳다, 그르다”를 언급할 수 없는, 원교의 “필명에 진요가 된” 조선 말기 서예가의 실태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直道以行의 추사는 원교에게 牽强附會한 당대의 서도계를 서슴치 않고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추사는 北碑南帖論에 입각한 북파를 지향하는, 국제적인 시각에서의 예술론 입장에서 조선의 동국진체, 송설체 등을 벗어난 서체를 연마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명문의 명필 가문의 추사가 조선의 서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추사 역시 초장년 시기에 조선의 명필들의 서체를 명필 가문의 후손으로서 손색없도록 절차탁마하였다. 그러나 추사는 청의 견문 후에 조선의 서체의 추종에서 탈피하고 南帖보다는 北碑論에 입각한 글로벌적인, 그러니깐 新世代의 세련된 서체에 深趣, 연마하고 있었다. 반하여 원교는 남파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문제는 원교가 원전으로 삼은 남파 왕희지 법첩인 [黃庭經] [樂毅論]은 판각을 거듭하면서 磨耗되고 변질되어 실제 왕희지체는 소실되었다, 즉 사실상 가짜인지라, 중국에서는 이미 예전에 썩은 쥐꼬리로 버린 것들이란 것이다. 이러한 조선 서예가의 실태, 변형된 쥐꼬리 서체를 봉황새로 알고 날마다 수련하고 있으니, 금과 옥조처럼 떠받들며 “迷惑의 속으로 들어가 의혹을 타파할 수 없는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있으니”, 古法을 격물치지하며 철저하게 학습한 추사의 혜안에는 한심하기도 안타까운 마음이 절절하여 질타의 선두에 나섰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