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秋史體에서의 실사구시적인 法古創新>- 2

clara jeon 2019. 6. 15. 16:20

괴테는 야만인들도 이상야릇한 필치, 무서운 형태, 또 거친 색채로 야자수 열매와 자신의 신체를 만들었으며 이 형성적 성격은 예술의 본질인데 이 질풍노도의 영향으로 성격예술을 유일한 예술이라고 보았다(Ernst Cassirrer, An Essay on Man, 조요한, [예술철학], 미술문화, 2003, p.51, 재인용). 추사의 필체는 거의 怪하다, 고아한 자태는 드물다. 그래서 추사의 필체를 보기만 하는 막무가내 무지한 혹자는 추사체는 아무나 써도 쓸 수 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추사체를 읽어낼 수 있는 心眼, 深眼의 감상자는 한 필획 내에서의 공간의 배치, 글자와 글자, 그리고 글자와 화지와의 회화적인 형성적(formative) 조화미, 이른바 괴테가 간파한 예술의 본질인 형성적 성격에 매료되고, 추사의 深心에 공명하게 되며, 글자의 그림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된다. 괴테는 이어 이 형성적인 예술의 본질은 인간이 자기 속에 생존이 안전하게 되자마자 활동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자기 속의 생존의 안전”이란 동양적인 心情, 深情으로 觀照한다면 平心精氣 博學篤行 水流花開일 것이다. 추사의 중장년 삶은 굴곡진 암울한 계곡 속에서 孤憤奮鬪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추사의 글씨는 波瀾萬丈한 그의 삶의 흐름과는 介意함이 없이, 초.중.장.말년의 구분 없이 나름의 형성적인 매혹이 깃들여 있다. 왜 일까.
       유홍준은 추사체를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와 그의 대표작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a)>비교하여 이들 작품들이 ‘怪’하나 ‘괴’로 흐르지 않고 고전으로 살아남는 미지의 매력을 그 구조의 견실성, 즉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가 아니라 필획과 구성의 힘이다(유홍준,[완당평전]2, p.583). 다시 말하면 글자의 외형의 표징을 받혀주는 골격의 골기, 뿌리 깊게 내린 필력에 의한 金石的인 서체의 형성, 그들의 견실한 힘의 구성미에 있는 것이다. 추사체는 추사의 실사구시적인 학문적 성향인 금석고증의 법고창신으로서의 평생 刻苦의 魂神을 다한, 方勁古拙한 해.행.초.전.예서 薰習으로 창출된 변화무상한 무수한 자형이 어우러진 潔淨體로, 서체 자체 공간뿐만 아니라 畵紙와의 審美眼的인 有機的인 배치로 현대적인 構圖의 洗煉美, 調和美, 그리고 前衛的인 파격미, ‘怪’함 조차도 深到의 멋스런 감흥을 주고 있어 현대인의 시각에도 隔意感 없이, 스스럼 없이 無頉하게 스며든다(필자의 앞의 글 <추사의 금석학 고증학에서의 탐구성> 요약). 이는 추사의 글씨가 前시대적의 고풍스러움의 우아스러움 古雅와 당대 유행의 서체를 섭렵, 그의 직도이행의 淸高한 性味의 맛깔스런 조화로서의 추사를 닮은 堅實한 뿌리깊은 추사 삶의 神似的인 表徵이라 볼 수 있다. 추사는 평생에 걸친 추사체로의 서체의 수련과정을 권돈인에게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을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그뿐이겠는가. 추사체의 特長인 金石骨氣는 [漢隸字源]에 수록된 비문 309개를 장인적 수련으로 연마하여, 추사는

팔뚝 아래 309비를 갖추다.

이 자긍은 자만이 아닌 구천구백구십구분까지 이르렀다하여도 남은 일분의 완성도를 위한 全力投球의 절차탁마를 의미한다. 格物致知 至高를 향한 전력은 추사가 [謙謙室記]에서 記述하였듯이 그의 謙心에서의 발현이다. 추사체는 추사의 장인적 수련과 연찬의 격물치지로 過慾이 배제된, 躐等 . 飛騰이 용납되지 않는 겸손의 최선의 노력으로, 씨 뿌리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힌, 四季의 어느 절기도 소홀함이 없이 정성을 다한 耕作으로서의 견실한 至高의 결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