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2)

clara jeon 2018. 7. 31. 17:26

   추사를 비롯한 그 가족들의 가화를 단도직입적으로 정리하자면 조선왕조사에서 가장 파행적으로 정국을 농단한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기’ 동안에 3차례의 안동김문에 의한 ‘추사 및 추사 일가 죽이기’이다.(안외순, <秋史 金正喜 家의 家禍와 윤상도 獄事>, 추사연구 4, p267) 그러므로 有力姓貫인 경주 김문인 추사와 그 일가가 정계에서 축출, 멸문 당하다시피 한 순조, 헌종대에 이어 특히 철종대 15년간의 안동김문에 의한 세도정치기(1800- 1863)의 樣態를 推移해야지만 그 양태들에서 추사의 행보의 부침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추사의 청장년 관료의 삶과 노년의 유배의 삶에 필연적으로 배경이 되고 있는 순조, 헌종, 철종대의 세도정치를 논지하기 위하여, 즉 외척세도기에 유력성관으로서 세 차례의 가화를 당한 추사와 추사가의 전면, 이면사를 논지하기 위하여, 前代未聞의 長長 60여 년의 안동 김문이라는 외척의 세도기의 토대가 된 영. 정조의 탕평책과 그로 인한 붕당, 파당, 그리고 이 두 가문의 黨色 등을 우선적으로 기술한다. 단 필자는 이미 영조대에 경주 김문은 정통적인 노론의 벽파로서 탕평을 반대하는 당색이었고, 안동 김문은 노론이지만 탕평을 지지하는 시파적인 당색을 가미하고 있었다는 추정 하에 論及할 것이며, 이는 다시 후술에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여 논증한다.

    ‘世道 政治’란 本來, 士林의 이상적인 통치이념으로 인간과 사회를 교화시켜 인륜을 올바르게 다스려야 하는 道理로, 벼슬을 하는 선비로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책무이자 권위인 世道之任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유학의 이상적인 통치이념인 世道之任의 의미가 정조대의 戚臣이자 寵臣인 홍국영의 黷亂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어져 일개 도승지, 금위대장이었으나 無所不爲의 그 실권이 재상이나 다름없다하여 홍국영이 “세도재상”이라 불리어져, 사림으로서의 정치 자세인 ‘世道’의 정당성이 戚臣과 寵臣에 의해 휘둘려진다는 비아냥의 ‘專權의 勢道’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훗날의 사가들이 전하듯이 외척세도는 실상 순조대 이후 시작된 것은 아니라, 이미 앞 시기 영.정조대의 정치에서 그 징조가 마련되었는데, 영.정조대에 蕩平策이 시행되면서 국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특권세력을 양성하게 되고, 이에 외척이 발호하곤 하였다.([추사와 그의 시대] 정병삼 외, 돌베개(파주), 2007, 20p) 영조의 탕평책 추진은 숙종대와 경종대의 정치적인 상황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숙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잦은 換局은 환국의 주체인 국왕의 黙認 下에 악순환의 고리로 정국을 평정하지 못하였고, 신료들, 특히 노론이 인정할 수 없는 미약한 왕권인 경종대에는 朋黨의 폐단이 극에 달해, 4년여의 짧은 재임동안 붕당의 주체인 세력들이 정권 장악을 위해 경종과 世弟마져도 이용하는 昏迷期이었다. 더구나 30대의 젊은 나이로 원인이 불분명한 경종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유언비어로 백성들을 현혹하여 영조 정권의 부당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국상을 치룬 정국은 더욱 혼미해져 갔다. 이런 政況에서 영조가 즉위하게 되고 을사년, 정미년의 환국을 거치면서 국왕을 비롯한 집권층 관료들이 노.소론 당파 폐해로 인한 혼란의 위기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영조에게 왕권 도전을 한 반란, 李麟佐를 首腦部로 하는 武臣亂이 전국적인 거병으로 확산 되자,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영조와 신료들은 붕당을 타개하고 보합하고자하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탕평책’을 추진하게 된다.(英祖代 蕩平策의 실상, 李熙煥, 전북사학, Vol.17 1994, p45)

    ‘蕩平’이란 ≪尙書≫의 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人君의 정치가 偏私가 없고 阿黨이 없는 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탕평’이라는 용어를 정치무대에 처음 제기한 사람은 1683년(숙종 9) 朴世采이다.(한민족백과사전,daum) 이미 선조대에도 파당과 붕당 타파에 대해 염려가 있었고, 숙종대에도 그러한 파당의 징후가 있었으나 왕과 지배계층들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는 별다른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여 탕평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세채의 노·소론간의 당쟁을 調律하려는 붕당 타파 주장은 실현되지 못한 채로 숙종대와 4년여 간의 경종대가 지나가면서 영조(재위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가 잠재되어는 파당의 혼미기에 등극 하였다. 영조는 경종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자신을 겨냥한 유언비어의 유포와 자신의 즉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집권당인 소론의 위세 속에서 군왕이 되었다. 때문에 영조는 극도로 실추된 왕권 회복의 추진을 신료들의 糾合으로 구축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영조를 推戴한 노론 역시 왕권이 약화된 가운데서의 집권은 불안하므로 왕권이 강화된 영조와 함께 정국을 운영하여야지만 자신들의 정권장악을 지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집권의 입지를 위한 절박한 상호 필요성은 비로소 박세체의 탕평론을 적극적으로 수용, 탕평책을 역사적으로 하나의 이념과 정책으로 확립한 “탕평파”라고 불리 우는 親王的 정치집단을 형성하였다.

    영조는 집권초기 왕권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탕평책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하여 軍師論 에 의거하여 각 붕당에서 내세우는 義理와 禮設, 斯文, 是非는 물론 士論 淸議까지도 모두 배척함으로써 붕당의 폐단을 뿌리 뽑았다.(<조선의 정치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 탕평론ㆍ탕평책ㆍ탕평정치를 중심으로, 김용흠,한국민족문화, Vol.58,2016,p561) 심지어 탕평파의 중심인물로 老論少論 竝用/倂用을 주장하는 조현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소론 쪽의 인물을 처벌하려면 반드시 노론 쪽의 인사도 함께 斷罪하는 兩治兩解을 적극적으로 실시, 사색당파의 탄핵을 단호하게 처벌하여 노소론의 적대감을 탕평으로 표면적으로나마 蠶食시키고, 노론 소론 인사를 상대적으로 對擧 등용하는 老少聯政을 적극 추진, 雙擧互對로 집권 초반에 탕평책을 정착시켜 왕권을 안정시켰다.(<영조의 탕평책의 실상>, p. 57-65)

    영조는 재임 중기에 淸流라 하는 노소론 강경파들이 영조의 施策에 반대하여 잠식되었던 붕당이 다시 파당 되고 정국이 혼란해지기도 하였으나, 초기 집권에 성공한 영조는 ‘混沌開闢’등의 주도면밀한 정략으로 더 이상의 試行錯誤없이 탕평정국을 운영 유지하였다. 老少聯政의 탕평책으로 왕권을 회복, 강화하고 안정시킨 영조는 1742년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문구를 친히 지어 碑에 새겨 성균관 泮水橋 위에 세워 ‘蕩平碑’라 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하도록 계책하여 자신의 탕평정책에 대한 열의와 자신감과 보여주었다.([한민족문화백과사전],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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