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4) 家禍 -서론(10)

clara jeon 2018. 7. 31. 17:41

   그러나 인간의 실존이란 단지 현재를 살기 위해 뭉치고 흩어지는 意志없는 微物이 아닌, 역사의 흐름 속에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軸, 정신인 眞 善 美의 사상으로 존립하므로, 이를 排除시키고는 추사가의 가화는 물론이거니와 終乃는 추사 개인의 배움의 여정, 더욱이 추사의 평생배움 여정의 골수, 지렛대인 直道以行의 사상성을 論之ㆍ論旨 할 수 없다. 추사가 主唱한 ‘淸高古雅’의 直道以行 志操가 없는 인간에게, 즉 진선미의 투명한 삶의 의지가 없는 인간에게는 배움이란, 삶이란, 그 여정이란 *楚人沐猴而冠(초인목후이관: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의 무리이면서 갓을 쓰고 있다는 뜻으로, 겉만 번드레하고, 實質이 이에 따르지 않음을 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인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單刀直入 말하자면, 19세기 중.후반기에 경주 김문이 안동김문에 의해 假借 없이 정계에서 제거되었지만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영원성, 인간들의 혼을 자극하고 파장을 일으키며 “살아있다”는 시공간을 초월한 感應, 텔레파시telepathy 그 生物性은 한 분야만의 전공으로 그 전공분야만을 부각하는 방법으로는 조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총체적인 시각으로서, 패자와 승자의 내면에 흐르는 행간과 행간 사이의 은폐마저도 읽어낼 수 있어야 <不二蘭圖>에서 ‘不二’의 限界조차도 넘어선, 추사의 평심정기 박학독행 수류화개의 진정 자유로운 삶의 매듭을 한 매듭, 한 매듭 논지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가 자신의 삶을 닮은 바람 속을 걷는, 달리는 蘭 한 포기를 그려놓고, 자신의 일생을 함축한 心象을 거듭거듭 畵題에 담아내고도 다 하지 못한 그 침묵의 깊이, 영혼의 울림을 共鳴하지 않는 한은 어떤 論意, 論旨도 무의미하지 않을까? 정인보는 이를 염려하여 “무식한 자들의 입에 의해 수다하게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 예견하며,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아, 선비가 古人을 희망하며 외로이 학문을 닦아서 이미 널리 배움으로 말미암아 깊은 경지에 이르렀는데도 묻혀버리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의당 恨이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 무식한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참으로 알아주기를 기필할 수 없는 경우라면 도리어 영원히 묻혀져서 그 깊은 아름다움을 잘 보전하여 무식한 자들의 입에 의해 수다하게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더구나 기세를 인연하여 그 輕重의 견해를 남과 똑같이 하거나, 또한 외부로부터 들은 것만 있고 스스로 주견을 지니지 못한 자라면 어찌 그와 더불어 공을 논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이 문집을 읽는 이들이 내 말을 따라서 그 의미를 찾아본다면 그 또한 느낄 바를 알게 될 것이다.([완당전집], <완당전집서> p5).

따라서 필자는 안외순의 枝葉的인 논지를 벗어난 通時的 시각에서, 즉 경주 김문과 안동 김문의 권력 다툼이 겉보기엔 현실에 실존하기 위한 투쟁이었을 지라도, 그것이 단지 생존을 위한 결집만이 아닌, 일당의 농단과 독란에 의해 파생되는 ‘勢道’ 정국의 흐름을 상호 견제하기 위한, ‘世道’를 위한 사상적 붕당의 시선에서 ‘추사가의 가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秋史 사랑채'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家禍 -서론(12)   (0) 2018.07.31
4) 家禍 -서론(11)   (0) 2018.07.31
4) 家禍 -서론(9)   (0) 2018.07.31
4) 家禍 -서론(8)   (0) 2018.07.31
4) 家禍 -서론(7)  (0) 2018.07.31